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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Sep 11. 2019

가짜뉴스의 극복

가짜뉴스에서 벗어나기 4

4. 가짜뉴스에서 벗어나기

가짜뉴스는 음모론과 달리 권력을 가진 둘 이상의 악한 의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또한 가짜뉴스의 생산자는 자신의 주장을 가짜뉴스로 인식하지 않거나, 못한다. 그저 자신의 심리적 생존 즉,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쯤으로 인식한다. 가짜뉴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무모한 방법은 가짜뉴스에 직접적인 물리력을 가하는 것이다. 물리적 압력을 받은 가짜뉴스의 생산자는 자신의 이익(=생존?)을 지키기 위해 더 강력한 가짜뉴스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가짜뉴스를 둘러싼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가짜뉴스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일일까? 만약 내가 단번에 가짜뉴스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을 말할 수 있다면 주말에 카페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2,900원짜리 커피나 홀짝이며 글이나 쓰고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시작했으니 어설픈 대안이라도 제시하는 것이 글을 시작한 이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들어나 보시라~


우리는 우리를 고통으로 내 몰고 있는 사회문제를 대할 때, 그 고통의 절박함에 쫓겨 조급한 해결책을 내놓아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속담으로 말하면 꽁꽁 언 발을 녹이기 위해 따뜻한 오줌을 누는 격이다. 당장은 얼어있는 발을 녹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줌이 찬 공기를 만나 발을 더 꽁꽁 얼게 만들어 결국 발은 더 빨리 동상에 걸리고 말 것이다. 사회문제는 사회가 안고 있는 병이다. 의사가 병을 치료하기 전에 하는 행위가 바로 진단이다. 현대의학은 과학혁명을 통한 진단 기술의 발달이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미경의 발명을 통해 사람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미생물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현대의학의 토대가 되었다. 사회문제도 다르지 않다. 처방을 하기 전에 진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앞서 어설프나마 가짜뉴스의 정의와 원인, 그리고 그 폐해를 언급한 것은 가짜뉴스를 객관적으로 진단해 보려는 시도다. 진단이 주관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름 음모론이라는 객관적인 연구 결과를 도입해 보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이제 어설픈 진단에 기초에 그 대안에 대해 고민을 해 보자.


가짜뉴스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가짜뉴스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슈퍼 컴퓨터에게 지구 온난화의 해법을 물었다. 슈퍼 컴퓨터는 쿨하게 대답했다. “인류를 없애라!” 가짜뉴스를 없애기 위해선 그 원인이 되는 이 사회를 없애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그게 무슨 대안이냐고? 그 대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일단 가짜뉴스가 판치는 이 사회를 견디는 수밖엔 없다. 그 고통을 견디기 싫어 조급한 대안을 내놓는 것보다는 그저 견디는 것이 오히려 가짜뉴스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된다. 사회문제는 마치 수렁과도 같아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깊이 문제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통해 말했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고… 하느님이 말씀으로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했듯, 마르크스의 선언으로 인해 인류는 본격적이고 목적의식적인 계급투쟁의 역사에 돌입한다. 현생 인류의 직접 조상인 사피엔스가 지구에 등장한 것은 약 20만 년 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사피엔스는 20만 년 동안 흑과 백으로 나뉘어 싸워 왔을까? 물론 아니다.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듯이 계급투쟁은 말 그대로 계급사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인류가 흑과 백으로 나뉘어 싸워왔던 역사는 기껏해야 1만 년이 채 안되었을 것이다. 여전히 문화적 계급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지금도 계급투쟁에 몰두하고 있다. 그 결과… 인류의 현재가 흑이 되었는가? 아니면 백이 되었는가? 이 지점에서 계급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는 잉여생산물이 계급을 발생시켰다고 주장했다. 난세를 타는 자들을 위해 모든 시기가 난세여야 하는 것처럼, 18세기 초기 자본주의를 통찰했던 마르크스의 입장에선 잉여생산물이 계급을 발생시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잉여생산물로 인해 계급이 발생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감히 마르크스에 대항할 생각은 없지만, 난 약간 생각이 다르다. 계급은 잉여생산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잉여생산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사회적 문제를 풀기 위해 계급은 잉여생산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기록도 되지 않은 몇 만 년 전의 일을 마르크스나 나나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현재의 필요성에 의해 해석할 뿐…


계급이 잉여생산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일단 가정해 보자. 19만 년 동안 수렵과 채집에 익숙해진 인류는 농경을 시작하며 극심한 기아와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농경을 시작한 사피엔스는 잉여생산물까지는 아니어도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산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연장자의 경험에 의지하게 되었고, 여성들은 남성들의 근육에 의존하게 되었다. 전자가 제사 문화의 근거가 되었다면 후자는 가부장제가 시작된 원인일지도 모른다. 시대를 훅 넘어와 2019년 대한민국으로 와 보자. 계급 사회가 잉여생산물의 필요로 인해 시작되었다면, 어느 정도 기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된 지금 굳이 계급이 필요할까? 여전히 계급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여전히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계급이 발생했던 그 이유와 사뭇 다르다. 계급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존이 아니라 자신이 더 많은 것을 가져가기 위해 계급의 유지를 필요로 한다. 왜 마르크스가 잉여생산물로 인해 계급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생존의 인식에 머물러 있다.


아무리 흑과 백이 가열찬 투쟁을 해도 그 결과는 언제나 회색으로 수렴된다. 그럴 거면 아예 회색을 전제하면 어떨까? 회색은 인류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다. 흑과 백이 투쟁한 결과로 얻어진 회색은 흑도 백도 만족스럽지 않다. 흑은 자신이 원하는 흑이 아니고, 백 또한 자신이 원하는 백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다시 흑과 백은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 색으로 물들이기 위해 투쟁한다. 결과는 다시 회색이다. 흑에게 백은, 또 백에게 흑은 소멸의 대상이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앞에서 가정을 하나 했다. 계급이 잉여생산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시작되었을지 모른다는 가정 말이다. 또 다른 가정을 해 보자. 흑과 백의 투쟁은 이 세상을 흑이나 백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회색을 만들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변증법은 흑과 백이 투쟁한 결과 회색이 나온다는 논리다. 그 회색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흑이나 백이 된다면 또다시 투쟁은 시작된다. 우리가 살고 있던 어느 시대는 흑이 주도권을 잡은 시대였다. 흑의 핍박을 받으며 힘을 키운 백은 어느 순간 백이 주도하는 사회를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각자는 그 사회가 흑과 백의 사회였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그 사회는 모두 회색이었다. 단 흑이 주도하는 사회는 흑에 가까운 회색, 백이 주도하는 사회는 백에 가까운 회색이었을지 모른다. 두 개의 가정을 섞어 보자. 계급은 잉여생산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시작되었고, 어쨌든 인류는 계급사회를 통해 생산력을 키워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계급으로 갈라져 있는 흑과 백은 치열하게 단지 회색을 만들기 위한 계급투쟁을 해 왔다고 한다면?



얼마 전에 교육 거버넌스 관련 논문을 쓰며, 거버넌스를 하기 위해선 첫째, 주도를 걷어내고, 둘째, 상수가 아닌 변수를 조작해야 하며, 셋째, 현재의 이해관계가 아닌 미래를 합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전에 거버넌스에 대한 선행 연구를 살펴보며 거버넌스가 국가 정책의 실패로 인해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그 주도권을 시장(시민?)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국가정책의 실패 이전에 이미 우리는 시장의 실패를 경험했다. 국가와 시장은 대체가 아닌 보완의 관계다. 그런데 자꾸 서로의 책임을 물으며 네가 못했으니 내가 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진정한 거버넌스는 누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가진 역할과 시장이 가진 역할을 효율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가짜뉴스에도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짜뉴스를 생산해 내는 사람을 죽여 없앨 수 없다면, 왜 가짜뉴스를 생산해 낼 수밖에 없는지 살펴야 한다.


세상에 답이 없거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짜뉴스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답을 회피하거나 쉽게 답이 없다고 얘기한다.

⓵  문제 해결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0과 1로 구성된 디지털 신호처럼 사람들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답 없음'으로 처리한다. 하나의 사회 문제 안에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구조적 모순이 포함되어 있다. 그 구조를 무시하고 쉽게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면 당장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나 더 큰 구조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불행한 현실은 그러한 파편적이고 조급한 문제 해결의 결과다.

⓶ 책임의 전가하거나 회피한다.
사람들은 나와 사회 문제를 너무 쉽게 분리시킨다. 하지만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사회 문제와 완벽하게 독립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효율적 생산을 위해 만든 '분업화'는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인간을 공동체에서 분리시켰고, '전문화'를 통해 분리된 개인의 이해관계를 이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시켰다.

⓷ 문제의 해결이 나의 이해관계를 침해한다.
사회가 생산할 수 있는 재화의 총량이 이해관계의 합을 훌쩍 뛰어넘은 말기 금융자본주의 속에서 객관적인 '공정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한테 유리하거나 그나마 불리하지 않은 것은 공정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나타나는 눈앞의 작은 불이익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왜? 나의 불이익이 공적인 영역의 이익이 아닌 누군가의 사적 이익이 되는 경험이 누적되어 있으므로…


지금까지 가짜뉴스의 정의, 원인, 폐해, 그리고 가짜뉴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설프디 어설픈 대안을 제시해 보았다. 대안을 제시하기 전에 분명히 나는 내가 제시하는 대안이 어설플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였다. 내가 제시하는 대안이 당연히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를 없애지 않는 한 사실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대안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더군다나 모든 개개인이 집단의 우위에 서 있는 지금, 사회문제의 해결은 오직 사회 구성원의 합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누구도 내가 아닌 타인에게 집단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할 수 없다. 그래서 일찍이 친절한 금자씨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나 잘하라고… 그래서 나는 나나 잘하기 위해 어설프게나마 가짜뉴스를 진단해 본 것이다. 부족한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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