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
집에 화병이 여러 개가 있다. 내가 제일 아끼는 화병은 전형적인 화병의 모양처럼 입구 주둥이는 좁고 중간 부분은 넓었다가 밑부분은 다시 적당히 좁아지는 도자기이다. 화병 앞 뒤에는 짙은 파란색 페인트로 빈티지한 그림체와 문구가 적혀 있다. 다른 화병은 작년 생일 때 동생한테 사달라고 해서 받은 부츠 모양 화병이다. 둘 다 불투명한 화병인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두 화병 모두에는 조화가 꽃혀 있다. 결혼하기 전까지 조화는 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이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이 생화 대신 조화를 사용해야 할 떄가 있어서 조화를 사용해보고 난 뒤 조화도 조화 나름이구나! 하고 새로운 세상을 맛보게 됐다. 하여튼 그 뒤로 가끔 촬영을 하거나 해외에서 스냅 사진을 찍을 때면 조화로 미리 부케를 만들어가곤 하는데 그 꽃들을 여기 도자기 화병에 꽃아두었다. 이 외에는 대부분 다 투명하게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화병들이다 대부분 입구가 좁지 않고 넓은 편인데 이는 내가 꽃을 산다면 한두송이가 아니라 다발로 많이씩 살 거라는 은연중 생각이 반영되서이지 않을까 싶다. 투명한 화병 중에서는 키가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고 주황색 아크릴로 만들어진 것 등 색도 크기도 다양하다. 화병이 찬장 밖으로 나올 때는 집에 어떤 이유로든지 꽃이 생겼을 때다. 내가 갑자기 꽃을 사고 싶어서 꽃을 왕창 구매했거나 기념일이어서 남편이 꽃을 사왔다던지 선물을 받았던지 말이다. 화병이 찬장 밖으로 나오면 대체로 나의 기분도 꽃을 따라 좋아진다.
화병 얘기를 하자면 어쩔 수 없이 꽃 이야기를 하게 된다. 정말로 꽃을 사랑하면 생화도 함부로 사지 못한다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지만 나는 가끔 집을 채우는 생화의 그 힘이 좋다. 평소에 다른 식물들도 키우지만 보통 다들 평범한 초록색이라 집안 풍경 속 하나로 너무나도 익숙하게 녹아들어가 있다. 그런데 갑자기 꽃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흑백영화에 컬러 사물이 뿅 하고 생긴 것처럼 일상이 다채로워진다. 몇일밖에 안 가서 하루 하루 지날 때마다 애간장이 타고 조바심이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몇일은 다른 날들과 또 다르게 특별한 날들이 된다. 결혼하기 딱 1년 정도 전에 집에 갑자기 꽃이 배달됐다. 나한테 꽃을 이렇게 갑자기 선물할 사람이 없는데 싶었지만 그래도 보낼만한 사람을 추려보자면 남편이었다. 남편은 즉흥적으로,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불특정한 꽃을 그 날 기분이 좋아서, 내가 갑자기 생각나서 사온다기보다는 특정한 기념일에 맞춰서 내가 좋아한다고 얘기했던 꽃을 기억했다가 사오는 편이다. 이때도 철저한 남편의 계산 하에(?ㅋㅋ) 결혼식 1년 전부터 한달에 한 번씩 꽃이 집으로 배달될 거라고 했다. 남편의 평소 스타일에 비해 너무 로맨틱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집으로 꽃이 배달되면 꽃을 화병에 꽃아두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즐겁다. 택배 상자를 뜯고 꽃의 상태를 확인하고 쓸모없는 가지와 잎들을 정리하고 물올림이 잘 될 수 있도록 줄기 밑 부분을 사선으로 잘라주고 바닥에 찰랑 찰랑 물을 받아 꽃들을 잘 배치해서 꽃는다. 가끔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느껴져서 꽃잎들을 만지고 코를 박고 킁킁대기도 하고 아주 가까이 확대해서 사진도 찍는다.
꽃은 상대를 얼마나 일상에서 성실하게 생각하느냐의 지표이다. 상대와 함께 사는 삶이 익숙해지면 가장 먼저 돈을 덜 쓰게 되는 게 이런 사치품이다. 단순히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기 위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다시 한 번 전달하기 위해 사는 꽃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 그 사진작가 니키였나 강태오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강태오가 매주 하루씩은 꼭 시장에 가서 아내를 위한 꽃을 산다는 것이었다. 상대를 위해 내가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수고를 무릅쓰고 기꺼이 하는 것과 상대방의 웃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태도가 참 인상깊었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가장 지키기 힘든 게 서로에게 (안 좋은 의미에서)익숙해지는 것이고 '(안 좋은 의미에서)익숙해지지 않는다'라는 것은 서로가 연애할 때처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고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시간에 역행하는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 왠만한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영역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특별한 기념일이 아니어도 꽃을 사오면 기념일에 어느 정도 조금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꽃을 받는 것보다 훨씬 벅차오르는 것 같다.
사람마다 딱 맞고 어울리는 옷이 있듯이 화병에도 딱 적당하게 어울리는 꽃이 있다. 백합의 쭉 뻗은 긴 대와 큰 머리가 어울리는 정갈하고 단순한 화병, 스위트피의 복잡하고 아기자기한 화형을 살려주는 둥그런 모양의 깨끗한 화병, 장미나 작약처럼 존재감 강한 꽃들을 툭 무심하게 한 송이만 꽃아도 예쁜 목이 길고 입구가 좁은 화병까지. 그리고 화병에 꽃이라는 옷을 고르고 입혀주는 사람의 입장으로 화병이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을 때면 너무 기분이 좋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데도 자꾸만 보고 싶다. 꽃이 억수로 많이 모여서 피어 있는 꽃 축제나 식물원에 가서 보는 꽃도 좋지만 정성껏 나만을 위해 고른 꽃들을 보는 순간이 더 좋을 떄가 많다. 나도 결혼생활이 조금씩 길어질수록 화병이 찬장 밖으로 나오는 횟수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다. 남편 보고 있나? 사실 요즘 꽃이 너무 비싸서 자주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한두달에 한 번은 퇴근길에 계절을 느낄 수 있는 꽃을 남편이 사다주면 좋겠다. 나는 봄에 아주 찰나에 피는 수선화를 좋아한다. 꽃 안에 쭉 뻗은 또 다른 꽃이 들어있는 그 꽃의 모양이 너무 아름답고 수선화의 다양한 색도 아름답다. 실제로는 하루 이틀 안에 수선화 생화는 시들지만 피어 있을 떄만큼은 수선화의 꽃잎이 너무 깨끗하고 딱 떨어져서 이 모습 언제까지고 영원히 피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올해도 수선화를 보러 가고 싶다 노래를 부르다가 시기를 놓쳐서 수선화를 보러 가지는 못했는데 몇일 전 남편이 수선화를 파는 꽃집을 수소문해 퇴근길에 수선화를 사왔다. 올해는 날씨가 참 이상해서 4월초까지 눈이 내렸는데 수선화가 우리 집에 들어온 지금에서야 진짜 봄이 시작된 것 같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도 매 계절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여지없이 다시 돌아오고 그 계절을 알려주는 지표는 꽃이다. 집 바깥의 시간을 집 안으로 가져오는 꽃이 더 자주 우리 집에서 피었으면 좋겠다. 화병이 더 자주 찬장을 나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