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결혼하고 나서 집 안의 습도가 문제였던 건지, 내 코가 문제였던 건지 겨울철만 되면 밤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코 안이 너무 건조해져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코 안이 아팠고 자고 일어나면 피딱지가 코안에 가득찼다. 겨울철 내내 몇 달을 그렇게 보내고, 덥고 습한 여름이 찾아와야만 코 안 사정이 좀 나아졌다. 뭐가 잘못된 건지 고민하며 살피다가 1년이 갔고 다시 겨울이 돌아왔다. 살면서 한 번도 그렇게 코가 건조한 적이 없었어서 작년만 그런 거겠지 했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코 안이 바짝 바짝 말라왔다.
매일 밤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옆에서 남편이 유튜브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원래도 핸드폰을 붙잡고 사는 사람이라 크게 신경쓰진 않았지만 '나 아픈데 왜 관심이 없지!' 하는 마음이 조금 들 참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집에 뭔가가 배송됐다. 남편의 이름으로 온 택배길래 뜯어보지도 않았고 남편이 퇴근하고 나서야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꽤 큰 가습기였다. 집에 이미 작은 휴대용 가습기들은 많이 있었지만 넓은 공간을 커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용량이었다. 남편은 가습기를 틀고 자면 코 안에 건조한게 나아질 것 같다며 열심히 찾아봤다고 칭찬해달라는 눈빛 가득 나를 쳐다보았다. 그 몇일 동안 유튜브로 집중해서 보던 게 가습기들 비교, 리뷰 영상들이었다. 내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남편이 나를 세심하게 신경쓰고 챙겨주는구나 하는 따뜻한 마음이 들자 '코가 아무려면 좀 어때, 좀 아파도 이렇게 챙김 받는데 충분히 아플만하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그 이후로 매년 겨울철이 돌아오면 매일 밤 가습기에 물을 담아 간이 테이블을 내 얼굴 쪽에 바짝 붙혀놓고 그 위에 가습기를 놓아준다. 회사 마치고 돌아와서 겨우 씻고 잠들 정도로 피곤한 남편이 가습기에 물 담아 놓아주는 건 거의 빼먹지 않고 해줬다는 게 일상에서 사랑받는 느낌을 가득 줬다. 때로는 내가 가습기에 물을 담아와도 충분한데, 내가 먼저 침대에 누워있고 남편이 화장실에서 가습기에 물을 담는 소리를 듣는 게 너무 좋아서 가습기에 물 넣는 걸 잊은 척 하기도 했다.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이 해주는 걸 받는 게 훨씬 좋은 종류의 일들이 있다. 나도 남편에게 그렇게 바라는 종류의 일들이 있다. 아침에 작은 그릇에 내가 먹을 비타민들을 챙겨주는 것, 내가 싫어하는 음식물 쓰레기를 항상 대신 버려주는 것, 가끔 집에 꽃을 사들고 오는 것, 매일 밤에 가습기를 켜 주는 것 등이다.
반대로 내가 남편에게 일상적으로 사랑을 느낄 수 있게끔 해주는 건 뭐가 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항상 간식으로 과일을 챙겨주는 것, 밥을 지으면 가장 좋은 부분을 먼저 퍼서 주는 것, 집에 들어오면 푹 쉴 수 있게 (웬만하면 항상) 깨끗하게 집을 유지하는 것, 잘 떄 항상 '사랑해'라고 말해주는 것, 남편이 말한 모든 것을 귀기울여 듣고 흘려보내지 않는 것. 사람이 항상 본인 위주라고 ㅎㅎ 따져보면 내가 남편한테 더 많이 일상적인 사랑의 기술들을 많이 선보이는 것 같은데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하여튼 남편은 매일 밤마다 가습기를 내 코 옆에 갖다 놓았고 그 덕분인지 3년 정도가 지난 지금 내 코는 더이상 겨울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습기를 볼때마다 한 번의 큰 이벤트보다 일상적인 노력이 얼마나 더 힘든지, 그리고 그 힘든만큼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