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인가 어김없이 찾아오는 감정의 롤러코스터와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 시간이 돌아왔다. 나는 항상 타인에게는 관대하고 스스로에게는 숨 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고 또 그 와중에 자책을 하며 스스로를 못살게 구는 타입인데(욕심과 오만을 내려놓으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그 날도 내가 계획한 일들을 다 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몰려들었다. 기분 전환을 하려고 스마트폰으로 재미있는 영상을 보는 순간에도 시간을 이렇게 쓸데 없는 데 낭비하고 있다는 또 다른 자책감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날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깊은 물 속이나 동굴에 혼자 떨어져 내려가는 느낌이다. 기분이 정말 아득할 정도로 가라앉고 내가 다시 저 물 위로 헤엄쳐 나갈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좌절감을 경험하곤 한다. 그럴 때 그래도 유일하게 내 감정의 상태를 까서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인 남편에게 투정과 짜증을 부리기 시작한다.
나 혼자 감정을 추스려보려고 마인드컨트롤을 해보지만 잘 안 돼서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밤 12시라 남편이 잘려고 누워서 폰을 보고 있었는데 이대로 남편이 먼저 잠들어버리면 나는 적막한 거실에서 새벽까지 날 탓하며 침잠할 게 분명하다. 얼른 남편에게 달려가서 '나 기분이 안 좋아'라고 말하는데 벌써부터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볼 위로 10방울 넘는 눈물이 툭툭 떨어지자 남편은 기분 좋게 잘려다가 놀라 자세를 고쳐 앉는다. 마치 초딩이 숙제 다 못해서 우는 것 마냥 '나 할 거를 다 못했어. 근데 자꾸 할 일들이 밀리니까 압도되는데 내가 다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라고 말하며 구슬프게 우는 나를 보면서 남편은 '너의 마음은 그게 문제야, 번아웃 오기 딱 좋은 마인드야'라며 여느 때처럼 차분하게 타이르기 시작한다. 본인도 일이 너무 많아 아득해질 때가 있지만 그럴 수록 그냥 내 눈 앞에 닥친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한다고. 하루 이틀 밀리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뭔가를 멈추지 않고 계속 하려고 시도하고 실제로 해나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라고. 남편의 말에 내가 모르는 새로운 아이디어나 인사이트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가야된다고 생각하는 방향성을 남의 입에서, 특히 내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의 입에서 들으면 묘하게 안정감이 들며 설득된다. 나를 향한 질타가 '내가 하지 못한 일'에 대한 게으름이 아니라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매정함'에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다음 날 남편은 회사에 출근하는 길에 나에게 영상 링크 하나를 보냈다. '너가 이걸 보면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아'라는 말과 함께. 이동진 평론가가 일에 대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영상 링크였다. 항상 그랬듯이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 안경을 쓴 이동진은 짬바가 느껴지는, 나긋나긋한 확신에 찬 말투로 이야기했다. '좋아할 필요가 있으면 그냥 좋아해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지속가능한지 한 발짝 떨어져서 봤던 경험이 참 도움이 됐다'.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없고 피할 필요가 없다면 즐겨라 같은 말로 들렸다. 또 이동진은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의 태도를 견지하고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얘기했는데 많이 공감했다. 요즘 내가 하려는 일의 방식이기도 하다. 내가 장기적으로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달려가도 그 목표 달성 여부를 통제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대신 내 눈 앞에 주어진 몇 시간, 하루 정도는 내 의지를 가지고 살아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차곡 차곡 최선을 다한 하루 하루를 쌓아나간다는 것은 인생 전체를 봤을 때 참 밀도 높고 의미 있는 삶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이동진도 얘기했듯이 저 말에서 방점을 뒷 부분에 있다.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라는 말을 인정하고 인생의 거스를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내가 내 인생에서 그나마 의지를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데 전체 방향성은 내가 원하는 방향과 반대로 갈 수도 있다는 말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나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라는 말을 커리어가 아니라 나의 태도에 적용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 전체를 되는대로', 여백을 기꺼이 허용하는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는 태도를 일단 하루씩만 가져보면 어떨까. 언젠가는 저 말을 들었을 때의 거부감이 사라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