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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과 함께라면

by 클라우드나인

나는 왜인지 아이를 낳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거의 없다. 그리고 상상 자체도 썩 기분 좋게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은 당연히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남자친구를 사귈 때마다 결혼을 생각했다. 그만큼 진지하게 만났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정말로 난 누군가와 연애를 할 때 항상 결혼 이후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상상이 꼭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상상 자체가 잘 그려지지 않는 사람도 있고 어떨 때는 불행한 나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미래의 상상으로 현재의 좋아하는 마음을 끝낼 수는 없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빠지기 전까지는 그 관계를 지속했다.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 (난 만나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결혼을 상상해버렸다. 낯선 사람과 처음 연애를 시작하면 다들 그렇듯이 설레고 긴장되는 그 느낌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야기가 잘 통했다. 단순히 티키타카가 잘 됐다는 걸 넘어서서 '진짜로'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상대방이 알아듣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만큼 내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을 살면서 거의 손에 꼽게 만나본 것 같은데 이 사람은 어쩔 땐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듯 했고, 그 부분에 나는 이끌렸던 것 같다. 당시에 나는 어렴풋하게 '이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은 내가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도 막힘없이 대화를 이어나갔고 그 안에서 진중함을 보여주었다. 남편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남녀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최고의 대화상대였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우리의 관심사는 1도 일치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대화가 잘 통했는지 모르겠다. 남편은 당시 중국, IT같은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대학교에서도 관련 학회원으로 활동했다. 반면 나는 여행, 음악, 미술 등에만 관심이 쏠려 있어 대학에서 풍물패, 밴드를 하며 열심히 여행을 다녔다. 성향도 정반대였다. 난 우리가 대화를 너무 막힘없이 이어가서 남편이 낯을 안 가린다고 생각했는데 원래는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이라고 했다. 반면 나는 처음 본 사람이랑도 편안하게 내 얘기를 하고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편이다. 또 남편은 분란과 갈등을 싫어해서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둥글둥글한 사람인데 나는 학창시절 갈등을 몰고 다녔으며 딱히 갈등을 피하지도 않는 편이었다. 남편은 신중하고 계획적이며 우리가 있는 지금 이 테이블 위의 것들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는 현실주의자이다. 나는 일상에서 거의 매일 상상과 공상을 즐기며 내가 즉흥적으로 이끌리는 것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편이다. 나중에 MBTI를 해봤더니 남편은 ISTJ(본인은 계속 ISFJ이라고 한다), 나는 ENFP가 나온 것만 봐도 우리가 극단에 서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비슷한 점도 있었다. 일단 동갑내기에 화목한 가정에서 형제 자매가 1명씩 있고, 둘 다 고등학교 때 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연고전으로 라이벌 의식을 가지는) 연세대, 고려대에 입학했다. 우리는 술자리는 싫어하지 않지만 술은 즐기지 않는 편이었고 패션, 공간 등 관심사가 비슷하기도 했다. 한 두번쯤 대학생활을 하면서 같은 공간에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같은 점은 적고 다른 점이 더 많았던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나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처음 알게 되고 이틀 정도 후에 같이 버스 옆자리에 앉을 일이 있었다. 지방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우리가 단 1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서로가 살아왔던 이야기, 연애, 커리어 등 나와 너무 다른 이 사람의 인생이 더 궁금해졌다. 그 버스 안에서 나는 우리가 언젠가는 연애를 하고 결혼하지 않을까 아주 잠깐 생각했던 것 같다. 버스에서 내리고 일주일도 안 되서 나는 남편에게 사귀자고 했다. 연애 기간 동안 나는 또 이 사람과의 결혼을 상상하곤 했다. 물론 내가 모르는 방해 요소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내 상상에서 우리는 행복했다. 결혼에 대해 더욱 확신하게 됐던 건 내가 이 사람이랑 결혼해서 뭔가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데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는 점이다. 내가 지금 빛나는 것처럼 남편은 나를 항상 있는 그대로 더 빛나게 해줄 것이고 혼자일 때 보다 이 사람과 함께 했을 때 더 자유로울 것이란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떨까 자꾸만 상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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