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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기술

by 클라우드나인

이제껏 연애를 해오면서 참 많이도 싸웠다. 어떤 전 남자친구와의 연애에서는 30%의 좋음을 위해 70%를 싸움으로 보낸다고 할 정도로 많이 다퉜던 것 같다. 싸움의 이유는 누구나 그렇듯 별 거 아닌 사소한 것에서 시작했다. 남편이랑도 연애할 때 몇 번 다툰 적이 있다. 나에게는 살면서 연인과 그렇게까지 평화로운 시절을 보낸 적이 없어서 충격이었는데 연인과 다툰 적 자체가 없는 남편에게는 몇 번의 다툼이 충격으로 다가갔다. 자신의 감정이나 속마음을 왠만해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남편은 연애 때 몇 번의 다툼으로 눈물을 보였다. 단단하게만 보였던 남편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냉랭한 분위기에서 싸운 적 자체가 거의 없어서 너무 힘들다고 했다.


결혼 이후에도 많이는 아니지만 가끔씩 싸울 때가 있다. 막상 싸웠던 이유를 떠올려보려니 잘 생각이 안 난다. 나만 느끼는 미묘한 말투로 다른 사람 앞에서 기분을 상하게 했다던지 나한테 먼저 물어보지 않고 주말 약속을 잡았다던지 하는 사소한 일들로 싸움이 시작된다. 싸움이 시작되다 보면 더 이상 처음의 이유는 중요치 않은 것 같다. 내가 지금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그 논리를 상대방에게 100% 이해시키고 싶고 진심어린 사과도 받고 싶다는 마음이 흥분으로 드러났다. 나는 보통 싸움이 시작되면 몇 시간이 걸리든 그 자리에서 상대방과 서로의 입장과 마음이 충분히 이해될 때까지 문제를 직면하고 투명하게 내 감정을 다 드러내는 편이다.


남편과 나 사이가 아니라 외부의 누군가랑 싸울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얼마나 옳았는지, 그리고 너가 얼마나 틀렸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시간과 마음을 썼다. 타고난 성향 차이도 있겠지만 남편은 말도 안되게 불공정한 대접을 받지 않는 이상 외부의 누군가랑 싸우지 않는다. 아마 내가 알기론 지금까지 없지 않을까. 남편은 애초에 갈등의 씨앗 자체를 많이 안 만드는 사람이라 나 말고 누군가랑 싸워 본 적이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싸움을 대하는 태도가 나와는 사뭇 다르다. 차분하게 시간을 갖고 상대방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본 후에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나의 싸움 방식 때문에 남편도 준비 없이 항상 전쟁터에 바로 투입되곤 한다. 그럼에도 남편은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나의 이야기를 듣고 최대한 나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 노력해준다. 그리고 창과 방패의 논리적인 싸움이 끝나고 나면 진심을 담아 사과하고 내 마음이 풀릴 때까지 달래준다.


남편은 싸워본 적이 거의 없는 아마추어 싸움꾼이지만 참 잘 싸운다. 나한테 무조건 져 주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식도 아닌데 싸움이 다 끝나고 나면 왠지 모르게 더 돈독해진 기분이 든다. 남편이 싸움 자체를 피하고 싶어서 동굴에 들어가는 스타일이었다면 나는 어떻게든 동굴을 막고 있는 돌들을 드러내고 동굴 안에 들어가서 불을 피우고 싸움을 시작했을 거다. 남편이 무조건 나한테 져주는 스타일이었으면 나는 점점 더 별거 아닌 일로 남편에게 싸움을 걸었을 거다. 그러나 남편은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도 나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면서 나의 기분도 풀어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싸우면서도 남편의 태도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남편이 나보다 인내심이 더 많을 수도 있겠으나 싸울 때 이렇게까지 평정심을 유지하고 이 싸움의 목적 자체가 싸움이 되지 않도록 잘 조절하기까지는 남편의 노력도 많았을 거다. 그런 남편의 노력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남편이 가진 싸움의 기술은 결국 내가 쓰고 있던 투구를 벗고 창을 내려놓게 만든다.


싸움이라는 건 가까운 관계라면, 특히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과정이다. 부부는 서로 살아 온 삶의 방식도 환경도 전혀 다른데 오죽할까. 싸움 자체는 많이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싸움의 목적, 싸움의 기술은 다른 문제다. 우리가 지금 온 기력을 다해서 싸우는 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우리가 함께 성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이기는 것 보다는 어떻게 잘 싸울지에 집중하게 된다. 또 이 어려운 시간이 상처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싸움의 기술을 연마할 필요가 있다. 나의 의견을 전달하되 상대방의 입장에 공감하고 상대방이 어떤 기분이었을지를 먼저 생각하는 거다. 또 솔직하다는 명분 하에 상대방에 대한 내 감정을 전부 토해내지 않고 단어를 잘 고르는 거다. 정확하게 나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고 다음에 이런 일이 덜 발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을 고민하는 거다. 이렇게 잘 싸우는 건 함께 잘 살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남편 덕분에 나의 싸움 방식도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내 생각과 행동이 얼마나 옳았는지를 상대방에게 논리적으로 이해시키고 상대방의 입장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나의 모든 능력과 감각을 집중했다. 상대방이 나의 논리에 말문이 막히면 속으로 일련의 승리감도 들었다. 남편과 살면서 나는 싸움을 조금은 다르게 바라본다. 저 사람을 이겨서 승리의 깃발을 흔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더 잘 살기 위한 과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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