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구로 보는 신혼생활-8

장식장

by 클라우드나인

결혼하기 전 나에게는 몇 가지 로망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모았던 폴리포켓을 진열해 놓는 것이었다. 폴리포켓은 90년대생이라면 알텐데, 쉽게 말하면 아주 아주 작게 미니어처로 만들어서 가지고 노는 레고 같은 장난감이다. 테마가 수백 수천 가지로 다양한데 나는 디즈니 덕후인만큼 내가 가지고 있는 폴리포켓의 80% 정도는 디즈니 테마이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미녀와 야수 등등. 본가에 있을 때는 내 방에 장식장을 놓을 공간이 애매했고 엄마가 물건을 주욱 늘어놓은 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 내 폴리포켓들은 창고 안 깊숙이 박혀 있다가 가끔 나에게 소환되곤 했다. 그런데 신혼집을 얻고 나서 외할머니가 본인 집에 있는 장식장이 거의 새거가 있는데 가져가라고 하셨다. 나와 외할머니의 취향이 꽤나 다르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며 외할머니댁에 갔는데 정말 할머니 말대로 새거에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처음 살림을 꾸리는 데 드는 돈이 이미 많았기도 하고 생각보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이삿날 그 장식장도 우리 집에 오기로 했다. 장식장이 꽤 무거워서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애를 먹긴 했지만 우리의 업무 공간, 서재의 왼쪽 벽에 자리잡게 됐다.


장식장은 가로로 세 칸, 세로로 네 칸으로 나뉘어져서 투명한 상부가 구성되고 하부는 큼지막한 불투명 여닫이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 12칸의 섹션에 디즈니 공주 컨셉별로 내가 그동안 이 순간을 위해 모아 온 폴리포켓들과 각종 잡동사니를 심혈을 기울여 셋팅했다. 인어공주 존에 들어가 있는 조개 껍질들과 우르술라 인형들, 육지에서 에릭 왕자님을 만나 행복해 하는 에리얼까지. 보기만 해도 배부른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이런 종류의 눈으로 보고 즐기는 아이템을 모으는 데에는 큰 취미가 없어서 이 큰 장식장은 오롯이 내 차지가 됐다. 남편은 그래도 확실한 취향을 가지고 모은 물건을 볼 때마다 눈이 하트로 변하는 내가 꽤 자랑스러운가 보다. 집에 누군가 올 때마다 (집도 작은데) 투어 코스 마냥 항상 내 장식장에 사람들을 데려간다. 그리고 눈짓을 하며 나에게 '얼른 너의 덕후력을 뽐내줘!'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럼 나는 마지못해 내가 어렸을 때 부터 모은 거고 이렇게 진열장을 들이는 게 나의 로망이었다는 것을 구구절절 설명한다. 장식장은 내 취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집합체이기도 하다. 어딜가든 디즈니는 우리 나이대에 대중적이었다 보니 "나 디즈니 진짜 좋아해"라고 하면 상대방도 "오, 나도!"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나는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더 디즈니를 좋아했는지 알려주고 싶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풀어내며 나의 디즈니에 대한 열정과 덕후력을 뽐내곤 했었다. 이제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이 장식장 하나만 보여주면 끝이다.


장식장에 곱게 서 있는 수 많은 캐릭터들은 1년에 한 번 정도씩 밖에 나올 기회가 주어진다. 거실에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를 올려놓은 길쭉한 선반이 있는데 첫 번째, 두 번째 칸에는 커피 머신과 휴지만 놓여 있기 때문에 나머지 공간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계절별, 시즌별로 디즈니 존을 만들어 꾸민다. 봄에는 백설공주, 여름 시즌에는 인어공주, 가을에는 라푼젤과 미녀와 야수, 겨울에는 겨울왕국, 결혼기념일에는 미키 미니 웨딩 피규어.. 이런 식으로 말이다. 시간이 정말 날이 갈수록 빨리 간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가 10대 일때는 시속 10km, 20대일 땐 20km, 50대일땐 50km... 로 더 시간 가는 속도가 빨라진다고. 어릴 때는 왜 자꾸 저 소리를 하나 생각했는데 내가 30대가 되보니 느껴진다. 20대에 비해 정말 시간이 빨리 간다. 매일 매일의 일을 쳐 내고 가족 행사에 참여하고 여행 몇 번 다녀오면 1년이 지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빨리 가는 만큼 시간을 더 깊게 잡으려 한다. 밖에 나갈 때마다 스마트폰이 아니라 하늘과 계절에 피는 제철 꽃을 보려 한다. 그리고 우리 집도 그 계절을 함께 느꼈으면 한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 집에서 살지는 모르겠지만 집도 그냥 사는 공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나의 시간을 깊게 만들어주는 요소였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디즈니 캐릭터들은 톡톡히 자기 몫의 일을 하고 있다. 내가 휴지를 뽑으러 갈 때마다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우고 커피를 내릴 때마다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자꾸만 알려준다. 장식장은 나의 계절들이 곤히 자고 있는 또 다른 집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싸움의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