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파
본가에 있는 쇼파는 천으로 된 쇼파이다. 쇼파는 소재마다 갖는 장단점이 극명히 나뉘는데 천으로 만들어진 소파는 확실히 따뜻하고 안락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세탁이 어려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디에서 묻었는지 모를 것들이 소파와 함께 낡아간다. 본가의 쇼파와 함께 했던 시간도 참 길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집에 있었는데 학생 때는 공부하느라 밤 새다가 침대에서 자기는 양심에 찔리니까 쇼파에서 쪽잠을 잔 적도 많았다. 본가에서 결혼 준비를 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왜 그런지 가죽 쇼파가 자리잡고 있었다. 무조건 독립하게 되면 ㄱ자로 넓은 가죽 소파를 사야지 하고 말이다.
우리가 결혼할 때쯤? 아니면 그보다 좀 전에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유행했다. 거기서 유일하게 정의로운 인물로 등장하는 이지아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가구 브랜드를 운영하는 오너로 나온다. 실제로 이 가구 브랜드는 '자코모'로 스카이캐슬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가구도 여기의 협찬을 받았다고 한다. 스카이캐슬을 너무 재미있게 봤던 영향이었을까 자코모라는 브랜드는 나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실제 제품도 찾아보니 고급스럽고 가죽이지만 너무 차가운 느낌을 주지 않았다. 원래는 쨍한 색상의 소파를 살까도 고민했는데 올화이트 벽지로 깨끗하게 정돈된 신혼집에서 포인트를 줄 수 있는 요소는 쇼파 말고도 많았다. 쇼파는 비교적 큰 면적을 차지하다 보니 아무래도 공간에 잘 어우러지는 베이지톤이 좋겠다 싶다. 신혼 살림을 들이면서 돈을 아끼지 않고 쓴 가구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소파이다. 우리가 결혼해서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상상해보면 아마 TV가 달려 있고 식사를 하는 거실에 가장 오래 앉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막상 결혼하고 보니 나는 TV를 볼 때도(정말 집중해서 보는 영화나 시리즈가 아니면) 대부분 뭘 하면서 멀티 태스킹을 하느라 식탁에 거의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앉아 있는 거 같은데 남편은 소파랑 한 몸이 될 때가 많다. 퇴근 후에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나면 남편은 소파 안 쪽에 앉아 ㄱ자로 휘어진 쇼파에 발을 올려놓고 한껏 늘어져 있는 걸 좋아한다. 내가 가루 떨어진다고 과자 같은 건 소파에서 많이 못 먹게 하지만 남편은 소파에 늘어져서 뭘 먹으면서 TV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남편은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고 밤에는 늦어도 1시에는 잠자리에 든다.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계획형 인간, 루틴이 몸에 베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유일하게 늘어지는 공간이 쇼파 위다.
가끔씩 우리 둘 다 할일을 일찍 끝내고(혹은 그냥 제껴두고) 몰입해서 영화나 드라마를 볼라치면 뭘 볼지 쇼파에 둘이 앉아서 한참을 고민한다. 이것 틀었다 저것 틀었다 하다가 결국 차선을 택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소파 위에 앉아 있으면 여름에도 가죽 때문에 서늘한 기분이 들고 땀 때문에 달라붙지 않아 시원하다. 가끔 추울 때 엉덩이는 차가운 상태에서 담요 하나 덮어주면 이렇게 천국같은 온도가 없다.
또 소파는 나에게 피신처가 되기도 한다. 보통 우리는 식탁 혹은 침실에서 다투는데 침실에서 다투고 남편이랑 같은 공간에 있기가 좀 어색하거나 미울 때 나는 쇼파로 가서 훌쩍인다. 남편이 가끔은 눈치 없이 나를 오랫동안 훌쩍이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거실로 나와 쇼파에서 처량하게 울고 있는 나를 달래서 다시 들어간다. 그때 소파는 나를 포근하게 맞아주고 내가 떠나갈 땐 미련없이 보내준다.
소파는 우리의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서 듣기도 한다. 저녁을 먹고 나서 나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남편에게 얘기하고 남편도 회사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토로한다. 항상 빨래가 건조되고 나면 소파 위에 우리는 빨래 더미를 던져놓는다. 그리고 시간 되는 사람이 앉아서 빨래를 개킨다. 그때는 빨래 개는 사람이 리모컨 컨트롤의 결정권이 주어진다. 보통 내가 쇼파에서 빨래를 갤 때는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범죄 다큐멘터리가 틀어지고 남편이 앉을 때는 하나로 특정하기 어려운 신상 프로그램들이 나온다. 특히 남편은 보기와는 다르게 연애 프로그램을 진짜 좋아해서 소파도 강제로 국내에 나온 모든 연애 프로그램을 시청했을 것이다. 그냥 겉보기에는 처음 쇼파를 샀던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새 거 같은데 우리가 소파 위에서 보낸 시간은 참 다채롭고 그 안에 눈물과 웃음이 다 스며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