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결혼한 후 각자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매일 붙어 있다. 결혼하고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감정과 많이 달라진다던데 나는 남편과의 관계성이 달라진 것 같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갑자기 뭔가를 새로 시작하거나 뛰어든다. 남편도, 엄마 아빠도, 동생도 이제는 나의 그런 도전 정신(?)과 과감함에 익숙해져서 조용하게 지내는 걸 이상하게 여긴다. 결혼 얘기가 처음 나왔을 즈음에도 나는 갑자기 프로파일러가 되겠다며 범죄심리 대학원에 무작정 원서를 내고 남편에게 통보했다. 남편 본인은 굉장히 안정적이고 계획적인 편이라 나 같이 변화무쌍한 타입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만도 한데 남편은 생각보다 차분하고 수용적이었다. 너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게 뭐든지 하라며 오히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궁금하고 배우고 싶은 게 있다는 게 부럽다고 했다. 남편의 지지는 나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약간 중심이 고정되어 있는 쇠공이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멀리 가려고 노력하며 중심부를 돌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변화무쌍하고 계속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남편에게 정착했기 때문이다. 나의 중심이 남편에게 단단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경제적으로 가계에 바로 도움이 되지 않는 나의 여러 취미 생활 등도 남편은 나의 본업과 아주 평등하게 지지하고 격려해준다. 작년에도 대학교 풍물패에서 치던 악기에 미련이 남아 장구, 꽹과리 등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남편은 이런 나를 한심하게 보거나 어이 없어 하지 않는다. 대신 초등학교 때 아이가 새로 무언가에 도전하고 성취해서 부모가 벅차 오르는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나를 대견해한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 것을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특별한 경험이다. 26살 때 남편을 만나 그동안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들을 새로 시작하고 그만두었는데 나의 살아 있는 역사를 남편이 기억해준다. 나의 행복한 감정과 지독히 힘들었던 감정들을 나 말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잘 찍힌 웰메이드 유튜브 브이로그 영상이 차곡 차곡 쌓인 것과 똑같다. 내가 강의를 하거나 연주회를 할 때면 남편은 마치 본인 자식이 첫 무대를 할 때의 마음처럼 코 끝이 찡하다며 한껏 기특하다는 눈빛을 보낸다. 내가 하는 일을 꼭 돈의 가치로 환산하지 않고 봐 주는 남편 덕분에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의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떠날 수 있다. 내가 하는 매사에 '그걸로 어떻게 돈을 벌거야?', '지금 시작하기에 좀 늦지 않았어?' 등 꼬치 꼬치 걸고 넘어졌다면 나는 금방 눈치를 보기 시작했을 것이고 나 스스로 철저한 검열에 열을 올렸을 것이다. 혹은 내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 뭔가를 새로이 하면서도 '나는 왜 이럴까', '왜 나는 한 가지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지 못할까'라는 죄책감에 시달렸을 게 분명하다.
2주 정도 후에 내가 3개월 간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성실하게 다녔던 장구반에서 발표회를 연다. 사실 나는 내가 뭔가를 하는 것을 가까운 가족이 안다는 게 왠지 부끄러워서 잘 얘기도 하지 않고 얘기하더라도 '그냥 그런 게 있어'라는 투로 최소한의 정보만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내가 정말 행복해하면서 하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발표회에 초대했다. 동시에 '너가 날 항상 믿고 사랑스럽고 기특하게 봐줘서 가능했던' 모습을 A+가 가득한 성적표로 보답하듯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당일에 실수하면 어쩌지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가족에게만큼은 항상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내가 잘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기대에 어긋날까 불안하다. 마치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안달 나 있는 마음과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오늘도 크게 소리는 못내지만 거실에서 발동작을 한 번 연습해 본다.
남편은 내가 굉장히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다른 사람같으면 이런 내 삶의 방식을 별 거 아닌 거라고 치부하거나 오히려 불안정한 삶이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을텐데 남편은 '나여서 할 수 있는 거야, 난 정말 특별해'라는 감정이 나를 꽉 채우게끔 한다. 평소에 이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나는 남편에게 내가 느낄 수 있는 최대한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면서 항상 반대의 상황을 준비한다. 남편이 나처럼 뭔가를 하고 싶다고 할 때 돈 걱정 하지 않고 '당장 네 눈 앞에 있는 모험에 뛰어들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를 준비한다. 재작년 연초에 1년 계획을 세우면서 나는 '남편에게 2년의 시간을 주기'라는 목표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남편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나처럼 순수하게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이 온다면 내가 최소한 2년은 남편의 행복을 위해 2년의 시간을 책임지겠다는 계획이다. 남편에게 계획에 대해 살짝은 부끄러워하며 덤덤히 얘기했을 때 남편은 당장 회사의 힘듦을 잠깐은 잊었던 것 같다. 이후부터 맨날 내가 나의 목표를 후회할 정도로 남편은 '나~~에게 2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이라는 가사에 멜로디를 붙여 집안 곳곳에서 부르고 다녔다.
누구에게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둬도 내가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안전망은 필요하다. 나에게 최소한의 도망갈 구멍도 없으면 우울감에 쉽게 빠진다. 내가 당장 처해 있는 상황을 잘 헤쳐나가지 못하면 나에게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막막한 벽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 덕분에 어린 나이에 그 안전망을 직접 충분히 사용해보며 단단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남편의 안전망이 되기 위해 더 노력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다. 실제로 남편이 '나 지금부터 2년의 시간 쓸거야!'라고 하면 걱정은 되겠지만(^^) 나는 망설임없이 '그래, 당연하지!'라고 말할 거다. 남편에게 내가 느꼈던 안전하게, 나의 생명력을 다채롭게 채울 수 있는 바로 그 시간들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 우선 당장 남편은 나에게 줬던 그 조건없는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2주 후에 있을 장구 발표회에 내 마음과 정성을 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