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무해한 존재에 대하여
어렸을 때 부터 강아지를 꼭 키우고 싶었다. 받은 만큼만 주려는 마음 가짐, 관계의 신뢰도가 시간에 따라 바뀌는 인간 간 상호관계에 지쳐본 사람이라면 절대적인, 무조건적인 신뢰에 대한 환상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준 사랑을 그대로 받고 그 이상을 나에게 퍼부어주는 존재, 난 강아지가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다.내가 다른 곳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나만을 바라보는 강아지에게, 사람에게는 기대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종류의 사랑을 받아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다.
강아지를 무서워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엄마, 아빠 때문에 한 번도 강아지를 키워 본 경험은 없었고 강아지를 키우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다. 결혼하면 꼭 강아지를 키울거라고 여기 저기 말하고 다녔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보니 키우기가 망설여졌다. 어디에 메어 있는 기분이 싫어 회사도 안 들어가는 나는 방랑벽이 있어 집에 3개월 이상 있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스타일이다. 틈만 나면, 그리고 돈이 생기면 국내든 해외든 집을 벗어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물론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옵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애견 친화적이지 않은 곳들이 많다. 내가 떠돌아 다닐 때마다 항상 애견 호텔이나 아는 사람한테 맡길 수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의 강아지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만 바라보며 삶의 전부를 나에게 바치는 그런 동물인데 지금의 나라면 너무 많은 외로움을 줄 것만 같다. 그래서 가끔 애견 카페에 가서 다른 강아지들을 바라보고 안아보는 것으로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 마음을 달래던 나와 남편이었는데 최근 사촌언니 가족이 다 함께 3주 동안 유럽 여행을 떠나면서 나에게 강아지를 맡아줄 수 있냐고 물어봐왔다.
잠깐 생각해보고 말해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강아지와 함께 하는 삶을 잠깐이나마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싶었다. 남편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흔쾌히 승낙했고 나는 곧 우리 집에 올 강아지, 단풍이를 손꼽아 기다렸다. 단풍이가 집에 온 날 늦은 저녁이었지만 우리는 왠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 살아 있는, 작고 새로운 존재가 우리 터전에 들어온 게 신기했다. 단풍이도 우리 집이 낯선지 여기 저기 킁킁 대며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강아지가 아플까봐 혼자 사서 걱정을 해서 강이지를 잘 들어올리지도 못했던 나는 그날 강아지를 내 옆에 두고 잤다. 혹시나 자다가 팔을 움직여서 강아지가 깰까봐 팔과 다리에 쥐가 났지만 아침까지 움직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단풍이와 함께 있으니 하루가 더 일과에 맞춰 정직하게 흘러갔다. 아침 7시 30분쯤 되면 눈을 떠서 얼굴을 핥고 발로 머리를 밟고 지나가는 단풍이 때문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 너무 피곤한 날에는 더 자는 척을 하기도 했지만 공을 물고 와 내 앞에 반복적으로 떨어트리는 단풍이 덕분에(?) 3주 간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9시쯤 단풍이 밥을 줄 때 내 밥을 챙겨 먹고 저녁 6시 쯤 단풍이도 함께 밥을 먹었다. 또 너무 더운 낮 시간대를 피해서 간단하게 산책도 챙기다 보니 하루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더 피부로 와닿았다고나 할까.
단풍이를 보면서 강아지의 성격도 정말 제각각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단풍이는 하는 행동을 보면 거절 당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게 바로 느껴진다. 그래서 '얘가 나를 자기보다 아래로 보고 있군' 하는 게 느껴져서 좀 언짢을 때도 있다. 단풍이는 정말 주인 껌딱지라 자더라도 무릎 위에서 자야 되고 쉴 때도 발에 엉덩이를 대고 쉬어야 한다. 밥도 손으로 하나 씩 주면 더 잘 먹는다. 가끔 집을 나갔다 들어오면 한 달 만에 본 것처럼 나를 반긴다. 현관문 옆에 있는 냉장고를 발로 긁으며 자신의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럴 때면 빨리 가방 내려놓고 놀아줘야지, 혼자 있게 했던 시간을 보상해줘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남편은 집에 들어올 때 단풍이가 보내는 환대로 인해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한 것 같다. 거의 단풍이가 울먹거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애처롭고 동시에 반가운 눈빛으로 자신의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격하게 표현하는 그 순간, 남편은 새로운 종류의 환대를 경험했다. 그리고 단풍이에게 완전히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