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방, 캐리어
내 인생, 아니 이제는 우리 인생에 여행은 너무 중요하다. 열심히 일하다가 가끔 쉬는 차원 정도가 아니라 여행은 곧 내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비중은 꽤나 크다. 그리고 이런 나를 만나 남편에게도 여행이 정말 중요해졌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한 경험을 너무 좋아하는 남편에게 사실 여행이 너무나도 잘 맞았던 거다.
우리는 결혼하기 전에도 그랬고 결혼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연차를 낼 수 있는 틈만 생기면 국내든 해외든 여행을 다녔고 번 돈의 대부분을 여행에 썼다. 내가 처음 가보는 곳을 남편과 경험하며 느끼는 감정들을 공유하는 것도 좋았고 나는 이미 가봤던 곳들을 남편에게 소개하며 신나게 떠드는 순간들도 행복했다. 나는 나중에 우리가 진짜 경제적인 자유를 이루고 돈, 시간 등에 얽메이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오면 여행하는 삶을 살고 싶다. 이렇게까지 여행에 진심인 우리는 결혼과 동시에 커플로 캐리어를 샀다. 그동안 샀던 캐리어들에 비해 훨씬 비싼 돈을 주고 샀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큰 돈을 들이면서 캐리어를 커플로 맞추겠나 싶어서 나름 큰 맘 먹고 샀다.
색도 내가 딱 좋아하는 물 빠진 하늘색, 탁한 하늘색이라 너무 좋았다. 남편 캐리어는 개나리 노란색이다. 진짜 애지중지하면서, 특히 처음 여행 갈 때는 내 팔이 떨어질 것 같아도 기스 안 나게 하려고 가방 이고 지고 다녔던 것 같다. 그런데 딱 비행기 내려서 짐 가방을 찾는데 벌써 수두룩 빽빽 기스가 어마무시하게 난 걸 보고 내 마음에도 기스가 났고, 좀 더 편하게 거칠게 들고 다니는 중이다. 너무 무겁게 하고 다녀서인가 가방에 달려있는 무게 재는 장치는 진작에 고장나버렸다. 맥시멀리스트인 내가 항상 옷도 바리바리 싸서 나가고 선물도 주렁주렁 사서 들어오는 바람에 캐리어 양 쪽이 편하게 닫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위에서 다리에 체중을 실어 캐리어를 힘껏 누른 상태로 재빨리 잠금장치를 닫아야 한다. 그래도 용케 내 케리어가 고장난 데, 깨진 데 하나 없이 잘 버텨주고 있다. 내 신혼 생활에서도 비슷하다. 가족, 내 커리어, 남편과의 알콩달콩한 연애 등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가져가려다 보니 지칠 때도 있다. 항상 우선순위를 정하고 나에게 더 중요한 것들을 고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내 캐리어가 버텨주기에 조금은 욕심을 부려서 이것저것 집어넣고 재빨리 잠금장치를 닫아보기도 한다. 결혼한지 4년도 안 됐는데 벌써 10개 넘는 국가에 캐리어도 함께 다녔다. 어떨 땐 땐 좋은 5성급 호텔에서, 어떨 땐 1만원짜리 민박집 바닥에 수도없이 펼쳐지면서 우리와 함께 다녔다.
캐리어는 여행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선택해서 남편과 함께 산 캐리어인데다가 내 삶에 그토록 중요한 '여행'에 꼭 필요한 물품이라 생각하니 남다른 애정이 생긴다. 아마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가구? 물품? 중 하나가 이 커플 캐리어가 아닐까 싶다. 모든 여행은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나에게 큰 영감을 주는 짜릿한 순간도 있지만, 제발 시간아 빨리 가라 빌게 되는 힘들고 지치는 순간들도 있다. 우리의 신혼도 비슷했던 것 같다. 대부분은 행복하고 안정감 있고 편안한 순간들이었지만 가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절망하고 답답해하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여행과 우리의 신혼 생활을 그 결을 같이 한다. 그리고 캐리어는 우리의 모든 여행과 신혼 생활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는 존재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캐리어에 남은 기스들이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단지 더럽고 지저분해서 지우고 싶은 흔적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여행을 함께 하며 생긴 흔적들, 추억들이라고 생각하니 완벽해보이진 않지만 그 나름대로 귀여워 보이고 대견해 보인다. 앞으로 우리의 여행, 우리의 신혼 생활을 하면서 캐리어에 어떤 것들을 담아낼지는 모르겠으나 으레 성공적인 여행이 그렇듯 나에게 꼭 필요한 것, 그리고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행복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주로 담기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