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밖 6개월의 실험, 그리고 새로운 시작
지난 4월, 더 이상 어떠한 실행과 실험도 하기 어려운 경직된 조직을 떠나 프리워커가 되었다. 그곳에 나의 소중한 시간을 더는 쏟는 것이 아깝다고 판단했다. 차라리 울타리 밖에서 더 넓은 기회를 만들고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하며 '내게 맞는 회사'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나는 17년 넘게 일을 하면서도, 아쉽게도 나와 결이 맞는 회사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회사란 다 그런 것"이라며 타협을 말하지만, 적어도 성장과 변화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그 '이상'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 간절했던 것은 회사의 규모나 이름값이 아니었다. '실험할 수 있는 환경'과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가치'였다. 내게는 꼭 한번 시도해보고 싶은 조직의 모델이 있었고, 그것을 실행해보지 않고 이 나이에 직장 커리어를 접고 싶진 않았다. 그런 조직과 리더를 만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여러 사회적 실험을 거듭하며 낮아진 자기효능감을 다시 채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언제든 인연이 닿는 회사를 만나면 합류할 생각이었기에, 사업자 등록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이름 석 자가 박힌 명함을 새로 팠다. 명료한 슬로건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스스로에 대한 셀프 브랜딩은 참 서툴렀다. 내부 브랜딩을 이야기하던 내가 정작 나를 한마디로 정의하지 못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명함 하단엔 저서 3권의 제목을, 뒷면엔 '나답게 우리답게 더 일할 맛 나는 세상을 위해'라는 내 업의 미션을 적었다. 그리고 이름 앞에는 '조직개발 스페셜리스트'라는, 스스로 붙이기엔 참 머쓱하고 민망한 호칭을 달았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어김없이 내 '소속'과 '호칭'을 물었다. 나는 그저 '최지훈 님'으로 불려도 괜찮았지만, 조직의 울타리를 벗어난 한국 사회에서 '님' 호칭은 아직 소수에게만 허용된 자연스러움인가 보다. 내가 자처한 적 없음에도, 나는 작가님, 선생님, 박사님 (난 아직 박사 논문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예전 직장의 직급이었던 부장님, 차장님으로 불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사업자 등록 여부와 상관없이, 나의 역할과 정체성을 담아낼 '사회적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부터 나는 [더인터널브랜딩랩]의 대표로 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더인터널브랜딩랩] 대표라는 이름으로 지난 반년을 돌아보니, 16개의 고객사를 만나 24회의 강연을 진행했고, 11개의 아티클을 기고했으며, 5주 과정의 프라이빗 워크숍까지 쉴 틈 없이 달렸다. 잘나가는 분들에 비하면 비루한 실적일지 몰라도, 울타리 밖에서 스스로 실험을 거듭하며 나의 직업적 효능감을 회복하기엔 더없이 충분한 경험치였다.
강연 주제도 조금씩 진화했다.
‘연차별로 채우는 일머리의 기술’
‘조직문화 튜닝 기본 세미나’
‘변화관리의 Key, 피플매니저들을 위한 조직문화 sync 세미나’
‘채용 브랜딩의 진정성을 위해 짚어봐야 할 것들’
‘성장의 혼돈 속에서 문화로 질서를 만드는 법’
‘조직 엔트로피 현상과 시스템 패러다임’
‘SHIFT : 직책자는 처음이라, 리더십 기본기’
‘일을 지배하기 위해 우리가 짚어봐야 할 것들’
단 한 번도 이전에 했던 강연을 동일하게 반복한 적이 없었다. 매번 고객사의 니즈와 참가자의 특성을 고려해 PPT를 새로고침 했고, 스토리를 바꾸고 질문을 다르게 준비했다. 멘토링을 준비할 때는 고객사의 최근 1년내 뉴스와 감사보고서, 지속가능경영보고서, 공개된 IR자료 등을 토대로 지금 현재 조직에서 맞닥뜨리고 있을 HR 및 조직개발 이슈를 스스로 분석했고, 이를 토대로 유의미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준비했다. 창업자의 창업 전 배경은 스몰토크를 나누는 재료로서 꽤 효과를 발휘했다.
8월에는 4번째 책 『더 시너지, 자기다움에서 우리다움으로』를 펴내며, 조직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나의 생각을 더 많은 분과 나눌 기회도 얻었다. 이 모든 과정은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플랜비, 오프피스트, 기고만장, MYSC, 진성 리더십 아카데미 등 HR 생태계의 든든한 지원군들이 함께해주셨다. 이 도움은 일방적인 배려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시너지'였다. 나의 기여와 그분들의 도움이 서로의 가치에 따라 상호 보완되는 관계 속에서, 나는 울타리 밖에서 오히려 '나다움'과 '우리다움'을 더 진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반년 정도 진행된 '더인터널브랜딩랩'의 시즌 1을 이제 마무리하려 한다. 감사하게도, 나의 다음 '실험'을 실행해 볼 수 있는 팀을 만나 곧 합류할 예정이다. 이 팀을 만나는 과정 역시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신기한 인연과 우연의 연속이었다. 지난 경험과 울타리 밖에서의 배움을 이 새로운 팀에 모두 쏟아보고 싶다.
이전에도 그랬고, 몇 차례, 회사를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다고 하니, 누군가는 내게 '프로 이직러'로서 무슨 비결이 있냐고 묻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저 업종을 희망했거나, 저 회사를 꼭 들어가야겠다고 계획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에 집중했을 뿐이다.
'더인터널브랜딩랩'이라는 이름으로 홀로 서본 시즌 1의 가장 큰 수확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삶의 불확실한 흐름에 나를 맡기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것. 과거의 나는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하고 예측해야만 마음이 편안해졌지만, 이제는 예측되지 않는 미래가 다가오더라도, 그저 서퍼가 파도에 집중하듯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즐기고 싶어졌다. 삶에 대한 진짜 주도권은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절감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미약하게나마 경험한 것이다.
만일 내가 또 언젠가, 새로운 조직에서 떠나 또 새로운 형태의 도전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지금보다 좀 더 단단해져서 인생의 파도를 즐기게 된 상태로서 더 온전해졌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