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부모 총회에서 만난 우아한 엄마들
처음 고등학교에 만난 학부모님의 나이는 우리 엄마와 비슷했다. 16년이 지난 지금, 학부모님들의 나이는 과장 조금 더해 다른 인연으로 만났으면 '언니'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더불어 16년이라는 시간은 나를, 한 8년 후쯤엔 고등학생이 될 아이의 엄마로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학교 생활에서 마주하는 어머님들과 아이들의 모습에서 자꾸만 미래의 나와 우리집 아이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학부모님들의 방문이 비교적 드문 고등학교에서 내가 학부모님을 가장 많이 만나는 건 학부모 총회다. 학부모 총회에서 어머니들을 뵈면 특유의 우아함이 느껴지는 분들이 있다. 차려입은 옷, 들고 있는 가방, 아이의 성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선생님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전교 1등 모범생의 엄마도 아이가 집에서 힘들게 하면 그늘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학교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을 때에도, 자신보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초보맘의 어쭙잖은 조언에도 차분하게 대응하며 온화한 미소를 날리는 분들. 이런 어머니들의 공통점은 "알아서 잘하는 자녀"를 둔 분들이다. 가정과 학교에서 제 몫을, 제 삶을 '알아서' 잘 살아내는 아이를 둔, 전생에 나라를 구한 분들이다.
"나는 우리 집 아이 고등학교 학부모 총회 때 저런 우아함을 풍기는 엄마가 될 수 있을 것인가?"
2. 자퇴하고 싶다는 우리 반 소녀
요즘 내가 학급 조례 시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3월 수학여행 갈 거냐고 물었더니 자퇴를 하고 싶다던 소녀의 등교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다. 자퇴에 반대하는 부모님과 두 다 가까이 실랑이를 하더니 결국 무단 결석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이와 부모님과의 사이가 좋지 않을 때 학부모님과의 통화는 매우 불편하다. 아이 편을 들기도, 어머니 편을 들기도, 그렇다고 객관적 입장으로 서 있기도 참으로 애매하다. 매일 아침 나도 불편하지만 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도 지침이 느껴진다. 아이의 스무살을 약 2년 앞둔 시점, 2년이면 육아 끝이라고 생각한 시점에 이렇게 또 다른 미션이 주어지면 정말 억울할 것 같다.
신생아인 아이를 돌보며 유치원에 가면 좀 낫겠지, 학교에 가면 좀 낫겠지 했는데 유치원에서는 영유아 시절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학교에서는 유치원 때는 생각지 못했던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이건 무슨 미션 임파서블도 아니고 대학 입시 말고는 손 갈 일 없을 것 같은 고등학교 자녀를 둔 어머니들에게도 매일의 미션이 주어지고 있다.
3. 우아한 엄마 되기를 꿈꾸며
다사다난한 10대, 20대. 나는 빨리 마흔이 되기를 바랐다. 마흔의 '나'는 좀 안정적이고 편안하지 않을까 하고. 어느새 꿈꾸던 마흔 살의 내가 되었다. 하지만 이 마흔은 내가 꿈꾸던 그 마흔이 아니다.
나의 마흔이 내가 꿈꾸던 그 마흔이 아닌 이유는 10대 20대의 내가 생각지 못했던 변수, 30대의 내가 조금씩 의심했던 그 변수.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엄마, 엄마"하고 하루에 수십 번도 외쳐대는 우리 집 아이 덕분이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육아가 조금씩 편해지는 건 분명한데, 사춘기가 다가올수록 상상도 못 했던 어려움이 엄습해 옴을 느낀다. 그럴수록 학교에 있는 아이들이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학원도 안 다니고 의대 가는 아이들 보면 저 아이처럼 우리 아이도 공부를 잘하려면 어째야 하나 싶고, 어떤 시련 앞에서도 생글생글 웃으며 학교 다니는 아이 보면 우리 아이도 저렇게 성격이 좋으려면 어째야 하나 싶고. 자퇴하겠다는 아이, 우울증을 앓는 아이들을 보면 우리 아이까지 겹치며 발을 동동동 구르게 된다.
불안한 마음에 우리 집 아이를 벌써부터 들들 볶다가 그럴게 아니라 지금 내가 만나는 아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담고 싶어졌다. 힘겹게 성장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무탈한 10대, 20대와 나를 비롯한 우리 엄마들의 무탈한 40대, 50대를 위해서. 10년 뒤 맞이하게 될 쉰 살은 내가 꿈꾸던 그 '쉰'이길 간절히 소망하며 그 기록을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