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 한 방울로 바다를 보다 ] / 02
1543년 신성로마제국 뉘른베르크에서 유럽 과학혁명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렸다.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전통을 따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우주론이 주류였던 시절,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태양 중심의 우주론을 담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출간했다. 이후 약 150년 동안 혁명의 나팔소리는 천문학에서 시작해 물체의 운동을 다루는 역학까지 퍼져나갔다. 1687년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이하 『프린키피아』)를 출간하면서 16, 17세기 유럽 과학혁명의 나팔소리는 절정에 달했다.
빛의 본질에 대해 영국왕립학회 간사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1635~1703)와 격렬하게 다툰 1677년 이후, 뉴턴은 캠브리지대학교 연구실에 칩거하며 수년간 두문불출했다. 마치 은둔한 연금술사처럼 살던 뉴턴을 세상으로 다시 끌어낸 이는 에드먼드 헬리(Edmond Halley, 1656~1742)였다.
헬리는 뉴턴을 찾아와 당시 연구 동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만약 두 물체 사이에 거리 제곱에 반비례하는(1/r²)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한다면 물체의 궤적은 어떻게 될까?" 뉴턴은 즉시 "타원"이라고 답했다. 이어 거리 제곱에 반비례하는 만유인력의 원리로 케플러의 타원 궤도 운동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편지를 보냈고, 헬리는 출판을 권유했다. 이렇게 탄생한 책이 바로 『프린키피아』였다(Christianson, 2002).
총 3권으로 구성된 『프린키피아』는 만유인력과 운동법칙은 물론,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이후 제기된 다양한 천문학과 역학 문제들을 수학적으로 해결한 성과를 담고 있다. 뉴턴은 힘과 운동량 등 기본 개념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며, 거리 제곱에 반비례하는 만유인력의 원리를 설명했다. 그리고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 등 세 가지 운동법칙을 수학적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개념과 법칙, 원리를 바탕으로 저항이 없는 공간(진공)과 저항이 있는 공간에서의 물체 운동을 해석했으며, 행성과 위성의 우주 공간 운동이 케플러 법칙과 일치함을 보였다(Newton, 2023).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통해 고대 그리스부터 유럽 과학을 이끌어온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 과학과는 다른 패러다임과 연구전통을 가진 과학 프로그램을 제시했다(Koyré, 1965).
영국왕립학회의 공식 후원으로 출간된 라틴어판 『프린키피아』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국제무대에서 뉴턴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45세 뉴턴은 일약 유럽 과학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뉴턴이 공리와 정리를 제시하고 논증하는 형식을 이해하려면 출중한 수학 실력이 필요했기에, 당시 『프린키피아』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프린키피아』는 왜 라틴어로 쓰였을까? 우선 당시 유럽의 학문적 전통에 따라 지식인의 언어는 라틴어였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뉴턴은 후크와의 갈등 같은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책의 내용과 형식을 어렵게 구성했으며,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소수의 학자를 대상으로 라틴어로 기술했다. 구체적인 내용도 기하학을 사용해 풀어냈다(Koyré, 1965).
뉴턴이 라틴어로 『프린키피아』를 쓴 또 다른 이유는 왕립학회의 공식 후원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영국왕립학회는 안팎의 여러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왕립학회는 이름만 '왕립'이지 왕실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해 재정적으로 늘 어려웠다. 그래서 회원 회비를 늘리기 위해 과학적 업적이나 입회 심사 없이 회원을 받았고, 그 결과 학회의 활동 수준은 계속 낮아져갔다(Lyon, 1944). 게다가 1666년 프랑스에서는 왕실 지원을 받는 12명의 국가과학자와 특별회원으로 구성된 과학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전문가 중심의 프랑스과학아카데미에서는 수리과학뿐 아니라 과학 전 분야에 걸쳐 수준 높은 연구와 토론이 진행되어 영국왕립학회의 위상을 위협했다(Hahn, 1971; Isavand, 2024).
왕립학회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프린키피아』 출간을 후원했다. 거리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과 물체운동, 특히 케플러 타원궤도 운동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당시 유럽 수리과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이었다. 이를 통해 학회 수준을 높일 뿐 아니라 뉴턴의 명성으로 더 많은 회원을 모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Koyré, 1965).
그렇다면 뉴턴은 왜 『프린키피아』를 썼을까? 앞서 본 바와 같이 학술적 측면과 왕립학회의 목적, 그리고 로버트 후크 같은 비판자와의 갈등을 줄이려는 정치적 의도를 고려할 수 있다. 이런 여러 의도와 목적 외에도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신학적 목적이다. 이는 『프린키피아』의 '일반주해'(General Scholium)에 잘 드러나 있다.
1713년에 출판된 『프린키피아』 2판에서 뉴턴은 책 말미에 일반주해를 추가했다. 이 일반주해에는 뉴턴이 매달렸던 핵심 문제들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뉴턴의 과학적 방법이 잘 소개되어 있다. 또한 이런 철학적 작업의 기반이 되는 신학적 요소들도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프린키피아』 일반주해는 17세기 말, 18세기 초 과학과 종교에 대한 귀중한 연구 자료 중 하나다.
리처드 벤틀리(Richard Bentley, 1662-1742)에게 보낸 편지에서 뉴턴은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을 더욱 고취하고 홍보하기 위해 『프린키피아』를 썼다고 밝혔다(Snobelen, 2001). 당시 영국의 자연신학은 자연에 대한 이성과 관찰을 통해 신의 존재와 본질을 알고자 했다. 그래서 과학과의 조화를 추구하며 새로운 시각으로 신과 창조를 탐구했다. 자연신학자들에게 자연은 참된 믿음을 지지할 수 있는 안정된 토대를 제공하는 책이었다.
이런 경향은 당시 과학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뉴턴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은 자연과학이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내어 "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과학자는 자연이라는 신전에서 관찰과 실험이라는 의식을 통해 창조를 재현하고 신을 경배하는 사제라고 보았다(Spencer, 2024).
뉴턴은 벤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색하는 사람들이 신을 믿게 하는 데 적용될 수 있는 원리들을 고려했다고 남겼다. 그 편지에서 뉴턴은 태양계 자체가 자유의지를 가진 행위 주체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설계되었다고 보았다. 행성 운동은 지적 행위자(intelligent agent)가 중력을 부여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고 역학과 기하학에 능통한 신이 태양계의 존재와 행성운동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Snobelen, 2001). 이런 자연신학적 목적과 의도가 『프린키피아』 '일반주해'에서 구체적으로 부각된다.
그런데 뉴턴은 왜 일반주해를 써야만 했을까?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프린키피아』 초판이 출간되었을 때, 신성로마제국의 수학자이자 근대 합리론자였던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 Leibniz, 1646-1716)는 데카르트역학과 이신론 관점에서 뉴턴을 비판했다(Shapin, 1981).
에드워드 허버트(Edward Herbert, 1581~1648)가 주창한 이신론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17세기 초 영국에서 형성된 기독교 합리주의였다. 이신론에 따르면, 신이 우주를 창조한 후에는 자연법칙에 따라 운행되도록 내버려둔다. 이런 이신론의 그늘에 있던 데카르트주의자 라이프니츠에게 뉴턴이 제시한 만유인력은 원인이 불분명한 역학 원리였다.
데카르트역학에 따르면, 우주를 진공 없이 가득 채운 물질들은 서로 직접 충돌하며 운동한다. 반면 뉴턴은 서로 떨어진 물체들이 만유인력이라는 끌어당기는 힘의 원리에 따라 운동한다고 보았다. 즉 직접 충돌에 의한 운동이 아니었다. 라이프니츠에게 만유인력에 따른 물체 운동은 원인이 없는 그저 신비한 설명이었다(Shapin, 1981).
사실 뉴턴은 만유인력의 원인보다는 크기에 관심을 두며 수학적으로 크기를 계산하고자 했다. 그에게 만유인력은 물리적 힘이라기보다는 수학적 힘이었다. 뉴턴은 그 힘이 물체 운동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수학적으로 증명해 만유인력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다(Koyré, 1965). 그래서 라이프니츠에게 만유인력은 원인 불명의 신비한 힘이었다.
또한 라이프니츠에게는 신이 계속해서 우주와 물체운동에 개입한다는 뉴턴의 생각이 무신론적 주장으로 들렸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뉴턴이 상정하고 있는 신은 창조주가 아니며 불완전한 신이라고 보았다. 뉴턴의 주장처럼 신이 계속해서 우주에 개입한다면 그만큼 우주가 불완전하게 창조되었고, 이는 우주를 창조한 신이 불완전하다는 뜻이었다(Shapin, 1981).
이제 뉴턴은 라이프니츠를 비롯한 여러 비판자들, 특히 이신론자들에게 『프린키피아』에 담긴 신학적 내용을 명확하게 드러내야 했다. 2판을 준비하면서 편집자 로저 코테스(Roger Cotes)는 뉴턴에게 여러 신학적 비판들에 대해 대응해달라고 부탁했고, 뉴턴은 일반주해를 통해 이신론에 대항하고자 했다(신재식, 2013).
17세기 당시 영국과 유럽의 지성인들은 이신론의 영향 아래서 『프린키피아』를 읽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뉴턴은 영국 자연신학을 고취시켜 이신론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으며, 독자들이 뉴턴의 의도대로 읽도록 안내할 필요성을 느꼈다. ■
신재식. 2013. 『예수와다윈의동행:그리스도교와진화론의공존을모색하다』. 사이언스북스.
정인경. 2020. 『모든이의과학사강의』. 여문책.
Christianson, Gale E.. 2002. 『만유인력과뉴턴』. 정소영 역. 바다출판사.
Isavand, Leila & Hadi Poormoghim. 2024. “Comparative Study of Scientific Academies between European Countries (Royal Society of Great Britain, Lincean Academy of Italy, French Scientific Academy), and Iran.” Advances in Applied Sociology Vol.14,No.3.(DOI: 10.4236/aasoci.2024.143011)
Koyré, Alexandre. 1965. Newtonian Studies. Harvard University Press.
Lyons, Henry George. 1944. The Royal Society, 1660-1940. Cambridge University Press.
Newton, Isaac. 2023. 『프린키파아』. 버나드 I. 코헨 해설, 배지은 역. 승산.
Hahn, Roger. 1971. The Anatomy of a Scientific Institution: The Paris Academy of Sciences, 1666-1803.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Shapin, Steven. “Of Gods and Kings: Natural Philosophy and Politics in the Leibniz-Clark Dispute.” Isis 72(1981/2). 187-215.
Snobelen, Stephen D. 2001. “God of Gods, and Lord of Lords: The Theology of Isaac Newton's General Scholium to the Principia.” John Hedley Brooke et al.(ed). Osiris, Vol.16: Science in Theistic Contexts: Cognitive Dimensions. 169-208.
Spencer, Nicholas. 2024. 『마지스테리아:과학과종교,그얽히고설킨2천년이야기』. 전경훈 역. 책과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