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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코맥 매카시

by 무체

십사 년 전 그날, 아이의 어머니는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생명체를 뱃속에 포태하고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녀 이름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기에 아이는 어머니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아이에게는 누나가 한 명 있긴 하지만,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 땟국이 질질 흐르는 파리한 아이는 가만히 바라본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아이의 안에는 이미 이유없는 폭력이 스멀스멀 싹트고 있다. 모든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잖는가. 12.


고통의 그림자가 서린 목화밭. 종이 지평선 위로 느리게 깔리는 어스름 속에서 지는 해를 등지고 흑인들이 꿈질거린다. 비에 잦은 강변 저지대에서는 거뭇한 형체의 고독한 농부가 노새를 내몰아 싸레질하며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12.


소년의 고향은 소년의 운명만큼이나 까마득하다. 세상이 인간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지는지 혹은 인간의 심장이 다른 종류의 흙으로 빚어진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거칠고도 야만적인 시기는 세상이 돌아가는 동안 다시 오지 않는다. 13.


바에 이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내들은 진흙으로 빚은 주술 인형 같은 몰골이었다. 마침내 누군가가 웃기 시작했다. 19.


지는 해를 바라보며 가다 보니 어둠이 뇌성처럼 떨어지고, 선득한 바람에 잡초가 빠드득 이를 간다. 밤하늘에 별이 어찌나 총총한지 검은 공간이 동이 나다시피 했다. 밤새 쓰라린 호를 그리며 추락하지만 그 수는 도통 줄어들지 않는다. 29.


사람은 자기 정신은 알 가능성이 상당하지. 왜냐하면 살려면 알아야 하거든. 자기 마음도 알 수야 있지만 알기를 원치 않지. 정말 그래. 마음은 들여다보지 않는 게 최선이야. 하느님이 정하신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 아니야. 아무리 보잘것없는 창조물에게도 주님이 점지해 주신 의미를 찾을 수 있지. 35.


그들이 나아가는 동안 동녘 태양이 창백한 빛줄기를 뿜어내다 느닷없이 핏빛을 뚝뚝 흘리며 평원을 불태웠다. 땅이 하늘로 빨려드는 삼라만상의 끝에서 태양은 미지의 테두리가 걷힐 때까지 거대한 붉은 남근처럼 불쑥 솟구쳐 단호히 버티고 앉아 그들 뒤에서 악의로 약동했다. 72.


하루 종일 하늘에 박혀 있던 달이 사라지고 없어 별빛에 의지해 사막길을 나아갔다. 96.


불볕에 전율하며 삭아 가는 돌덩이에 돋은 오코티요와 선인장, 바위, 존재하지 않는 물, 모랫길, 그들은 물의 암시가 될 초록빛이 없나 계속 찾았지만 가뭇없었다. 97.


표류자들은 길가에 섰다. 말 위에는 , 금방 태양에서 빠져나온 듯이 그을리고 초췌한 얼굴이 아무 무게도 나가지 않는 양 앉아 있었다. 99.

어둠이 눈에 익자 벽에 주르르 웅크린 사람들이 보였다. 불안이 스멀대는 쥐구멍 속 쥐새끼들처럼 건초 침대가 동요했다. 113.


왜냐하면 그들의 행동이 궁극적으로 그들의 이해가 덧붙여지든 아니든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가능한 한 관련 사실을 제삼자인 목격자를 통해 확증해야 한다는 합당한 원칙과 반드시 공존해야 하네. 129.


어휘야 말로 힘이야. 자신이 소유한 어휘는 결코 강탈당할 수 없다네. 권위는 그 의미에 대한 무지를 초월하지. 129.


백열하는 태양과 창백한 복제품인 달은 최후의 심판일이 끝나고 불타 버린 세상 위로 뻥 뚫린 구멍의 양끝 같았다. 130.


인간의 궤적과 응보가 폐기된 채 널브러진 황야에 걸맞은 소용돌이였다. 인간과 인간의 짐승과 인간의 마구가 의지나 천운을 넘어 제삼의 혹은 달느 운명을 향해 실제로나 카드 상으로나 위탁되어 움직이는 듯했다. 145.


바람이 어둠에 이울고, 밤의 존재들이 가고 없으나 태양이 채 떠오르진 못한 창백한 첫새벽에 부대는 출발했다. 145.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받은 글이다. 문체가, 전개가 매혹적이다. 특별한 줄거리보다 잔학한 인간 내면에 집중한 소설이다. 굉장히 유감인 것은 저지 홀든을 판사로 표기해서 몰입이 안 된 점이다. 그냥 저지 홀든이라고 해도 되었을 것을 판사라고 번역한 이유를 모르겠다. 법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닌 별칭에 가깝고 그런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기에 적확하다고 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유감.


책을 읽으면서 내내 모비딕이 떠올랐고 데미안도 오버랩되었다. 미드 트루 디텍티브 시즌1도 떠올랐다. 저지 홀든은 인간인가 사탄인가 되게 모호하게 설정한 것 같은데, 인간이 사악한 짓을 하면 뭐에 홀린듯 이끌려서 악행을 하게 되는데 그런 존재로 그려 놓은 건가 싶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황량하고 잔인하고 바람 부는 먼지 사막이 떠올랐다. 읽고 난 후에도 입안 가득 먼지가 쌓여 있는 기분이 들었다. 찝찝하고 불쾌하지만 경이롭고 특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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