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luerosebook

거인이 실제 존재했는가?

by 무체

거인이 실제로 존재했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인류가 세계의 기원을 어떻게 상상해 왔는지를 드러내는 출발점이 된다.

오늘날 학계는 신화 속 거인을 문자 그대로의 초거대 인류로 보기보다, 고대인의 기억과 자연환경이 뒤섞여 탄생한 상징적 존재로 해석한다. 기원전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거대한 화석들이 인간의 뼈로 오인되었고, 매머드나 마스토돈 같은 거대 동물의 잔해는 “과거에는 거대한 인간이 살았다”는 상상을 낳았다. 또한 네안데르탈인이나 초기 인류처럼 체격이 크고 근력이 압도적이었던 존재들이 후대에 과장된 채 전승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폭풍, 빙하, 절벽 같은 자연의 압도적 규모가 의인화되면서 ‘거인’이라는 우주적 형상이 만들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이러한 배경은 거인을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세계의 형태를 설명하기 위한 원초적 상징으로 이해하게 한다. 이 상징적 토대 위에서, 각 문화는 거인의 몸을 우주의 재료 삼아 세계를 조립하는 서사를 발전시켜 왔다.


북유럽의 창조 신화는 얼음과 불이 충돌하는 긴눙가가프의 공허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서 물방울이 응결하여 최초의 거인 이미르가 생겨났고, 그는 암소의 젖을 먹고 성장하며 여러 거인들을 낳는다. 그러나 신들의 계보를 잇는 오딘, 빌리, 베는 이미르와 그 후손들의 혼돈적 성향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그를 살해한다. 이미르의 몸에서 쏟아진 피는 홍수가 되어 대부분의 거인을 쓸어버렸고, 베르겔미르 부부만이 살아남아 이후 거인족의 조상이 된다.


신들은 이미르의 시체를 해체하여 세계를 구성한다. 그의 살은 대지가 되고, 뼈는 산맥이 되며, 피는 바다로 흘러간다. 두개골을 뒤집어 하늘의 돔을 만들고, 뇌수는 구름이 된다. 세계는 원반 모양으로 정리되었고, 그의 속눈썹으로는 중앙 세계를 둘러싸는 울타리가 형성되어 미드가르드라 불렸다. 또한 거인 여인 놋트와 그의 아들 다그는 각각 밤과 낮을 상징하며, 말과 마차를 타고 하늘을 왕복하며 시간의 흐름을 만든다.


새로운 세계가 완성되자 신들은 그곳에 살 존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해안가에 떠밀려온 두 그루의 나무—물푸레와 느릅나무—를 발견한 신들은 이 재료로 인간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물푸레는 남자 아스크로, 느릅나무는 여자 엠블라로 형상화되었고, 오딘은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었다. 북유럽 전통에서 나무는 정령이 깃드는 생명의 매개였기에, 인간을 나무에서 빚어냈다는 발상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생명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는 신념을 반영한다.


거인의 몸을 해체하여 세계를 만든다는 모티프는 북유럽만의 상상력이 아니다. 인도 리그베다의 푸루샤 신화에서 신들은 우주적 거인 푸루샤를 제의적으로 희생시켜 세계와 사회 계급을 만들어낸다. 푸루샤의 몸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는 상징적 도구로 사용된다. 중국 신화의 반고 역시 죽음 이후 몸 전체를 세계의 재료로 내어주며, 그의 숨결이 바람과 구름이 되고, 눈이 해와 달로 변화한다. 반고의 몸은 우주 전체를 살아 있는 신체로 이해하는 동아시아적 세계관의 핵심을 이루었다.


인류 창조의 재료

거인 신화로 읽는 창조의 비밀 영상으로 보기


나무로 인간을 만든 북유럽 신화와 달리,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흙을 반죽해 인간을 빚었다. 마야 문명의 『포폴 부』에서는 신들이 옥수수 반죽으로 인간을 만들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여신 아루루가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재료는 다르지만, 무기물 혹은 식물적 재료에 신적 숨결을 더해 생명체를 완성한다는 발상은 공통적으로 반복된다. 이는 창조 행위가 단순한 조형이 아니라, 생명을 불어넣는 영적 개입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북유럽 창조 신화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자연 인식과 생존적 감각이 응축된 이야기다. 얼음과 불의 충돌, 해체된 거인의 몸, 나무에서 태어난 인간이라는 모티프는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세계를 이루는 근원적 질료로 바라봤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동시에 이 신화는 전 세계 창조 서사와도 깊이 연결된다. 거인의 희생에서 세계가 태어나고, 자연의 재료에서 인간이 만들어지는 구조는 문화권을 초월해 반복되는 상징적 패턴이다. 이는 인간이 자연과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적 정서를 드러내며, 거인의 몸은 결국 우주의 첫 질서와 생명 순환을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은유로 남아 있다.


북유럽·중국의 서사 외에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전통에서도 거인의 몸을 우주의 재료로 삼는 창조 신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문화권들은 거인을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혼돈의 원형, 혹은 의례적 희생의 첫 몸체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북유럽 신화와 구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아래에서는 각 전통의 맥락을 보강해, 세계적으로 반복되는 거인 신화의 패턴을 완성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에누마 엘리시』는 세계를 혼돈에서 질서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거인의 몸이 직접적으로 활용되는 대표적 사례다. 이 신화에서 티아마트는 단순한 여신이 아니라 바다 자체, 즉 원초적 물질의 의인화된 모습이다. 그녀는 혼돈의 자손들을 낳으며 세계를 뒤흔들지만, 젊은 신 마르둑이 그녀를 쓰러뜨리며 창조의 전환점이 마련된다. 마르둑은 티아마트의 몸을 정확히 두 조각으로 나누어 상반신을 하늘로 고정하고, 하반신을 대지의 토대로 삼는다. 이 분할 행위는 북유럽 이미르 서사의 ‘해체에 의한 창조’ 구조와 유사하며, 혼돈의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을 질서 속으로 재배치하는 창조적 행위로 해석된다. 티아마트의 살점은 땅이 되고, 그녀의 눈에서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묘사되며, 세계의 지형은 곧 거인의 신체적 기억으로 구성된다.



인도 리그베다의 푸루샤 찬가는 거인 신체 해체 모티프가 가장 철학적으로 정립된 사례이다. 푸루샤는 창조 이전의 거대한 우주적 인간이며, 그의 존재는 세계 전체를 내포하는 원형적 몸이다. 신들은 푸루샤를 제의적으로 희생시키고, 그 몸의 각 부분에서 세계와 계급 질서를 형성한다. 그의 입에서 브라만(사제)이, 팔에서 크샤트리아(전사)가, 허벅지에서 바이샤(상·농민)가, 발에서 수드라(노동자)가 태어난다. 몸의 분해는 곧 자연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가 동시에 세워지는 사건이며, 이 점에서 푸루샤 신화는 거인의 죽음이 우주의 조직 원리를 낳는다는 보편적 상징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다.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거인의 몸이 우주의 기원과 연결되는 전승이 나타난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 신화에서는 최초의 인간이 거대한 신적 존재의 뼈와 살로 만들어졌다는 흔적이 있고, 일부 시베리아 샤먼 전통에서도 산과 바위가 원초적 거인의 신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설명된다. 남아메리카의 마푸체 전승에서는 거대한 뱀-거인이 패배한 후, 그 몸에서 땅과 강이 생겨났다는 신화가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 일부 종족은 거인의 두개골이 하늘을 떠받치는 궁창의 원형이라고 믿었다.

이처럼 거인의 몸이 세계의 물질적 토대가 된다는 구조는 특정 문화권의 고유한 발명이 아니라, 고대 인류가 자연의 규모를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가장 원초적인 비유적 체계였다. 산은 뼈, 강은 피, 구름은 숨결이라는 대응 구조는 전 세계적으로 유사한 형태로 반복된다.


거인 창조 스토리 원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생과 사의 순환 윤회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