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생활에 가장 필요한 자질은 뭘까?
나는 일만 벌리는 사람이다. 무언가를 시작해놓고 잘 끝맺지 못한다. 노트의 첫 장만 화려하고 끝 장을 채워 본 적은 거의 없고, 취미는 계속 바뀌어 집에 쌓인 악기, 미술 교구, 운동 기구만 해도 여러 개다. 어렸을 때도 문제가 잘 안 풀리면 답이 떠오를 때까지 고민하기 보다는 답답함에 해답부터 보곤 했다. 어떤 일을 잘 완성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내 삶의 영감과 활력이다. 그런 나에게 꾸준함과 깊이를 요구하는 연구는 잘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성격에 게으른 완벽주의까지 더해졌다. 연구 중 작은 것이라도 문제가 되면 그냥 넘어가지를 못했다. 의도한 분석 결과가 안나올 때에는 상황을 돌파할 생각보다 이건 안돼라는 생각의 틀에 갇혔다. 연구 진행은 더뎌졌고, 지도 교수님께 연구 경과 보고가 늦어질 수록 더 좋은 결과를 들고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어 연구 미팅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회피하기도 했다. 이렇게 논문 작업의 도돌이표에 갇혀 졸업 논문을 끝맺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 나가 완결을 보는 보람찬 끝맺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로 갑자기 찾아오는 자의가 아닌 타의의 끝맺음이 있다. 일의 진행중에 시원하게 포기하고 손을 털어버리는 것도 끝맺음의 일종일 것이다. 끝이 버겁고 두려운 나는 이 세 가지 끝맺음 중 어느 것 하나 하지 못한 채 박사 과정에 멈춰있다. 어쩌면 고여 있다라고 표현하는게 더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학기가 지날 수록 목표와 현실 사이의 자괴감만 커졌다. 처음 대학원에 입학 했을 때의 대단한 논문을 쓰겠어, 멋진 교수가 되겠어라는 큰 포부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졸업만 하자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친구들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나가는 와중, 계속 학생으로 지내다 보니 자신감을 잃고, 학비만 축내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생각하기도 했다. 사회에서 내가 1인분의 몫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어떤 회사가 나를 받아줄까 구차하고 간절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졸업이 미뤄지는 것은 단순히 졸업 시기만 늦춰지는 게 아니었다. 졸업 후 사회에 나가 벌 수 있는 기회비용을 생각해보면 년에 수천만 원씩의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할 수록 과거에 내가 헛되이 보낸 시간에 대한 회한이 발목을 붙잡았다.
박사 졸업에 실력보다 중요한 것은 끈기와 집요함이었다. 진득하게 앉아서 연구하는 친구들이 그저 부러웠다. 꾸준히 연구하는 친구들은 여러 편의 논문을 내고 학계와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 끈기 있는 자질이 부러웠고 어떤 일에도 금방 흥미를 잃는 내 성격을 탓하게 되었다.
하지만 연구가 너무 즐거워 하는 대학원생이 몇이나 있을까? 동료들과 대화하다보면 그들도 나와 크게 다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그들과 내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논문을 써냈다는 것. 괴로워도 끝끝내 해내는 자세를 가졌다는 점이다. 박사라는 긴 레이스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자세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가장 잘한 논문은 끝낸 논문이다'라는 선배의 말이 귀에서 맴돈다. ‘박사 과정’이라는 말처럼, 과정을 해나가는 중에 최고의 논문을 쓰겠다는 건 큰 욕심이다. 이 과정의 끝에서 더 큰 존재로 남을 것은 논문 몇 편보다는 이 레이스를 끝까지 완주해낸, 더 어렵고 복잡한 문제도 돌파할 준비가 된 내 자신일 것이다. 당장 만족스러운 논문을 쓰기 보다는 박사과정이라는 하나의 과정을 끝내고 더 발전할 나를 기대하며 남은 레이스에 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