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한창이고 매미소리 우렁차다
실컷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그런 지점이 있다. 산을 오르다가 문득 걸음이 멈춰지는 곳, 운이 좋으면 그 산에 한 그루 있는 가장 어른스러운 나무 아니면 가장 꽃다운 나무 앞. 때때로 바위가 되기도 한다. 기운이 서려 있는 바위는 꼭 절묘한 풍경을 품고 산다. 바위에서 바람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다. 바람이 눈에 들어오는 곳에 서면 바위도 나무도 하늘도 거기에 사람만 없다. 사람은 흔해서 그리고 믿을 수 없어서 절대로 고요한 풍경에서는 '사람 없이도' 좋을 그림이 마련된다. 풍경이 동경하는 풍경, 누군가 월출산에 가면 구정봉에 오르라고 친절하게 말해줬을 때,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91년 11월 늦가을에 월출산에 오르고 지난가을에도 거기를 찾았다. 가을에만 -가을이다 싶은 때부터 가을이···· 싶은 날까지- 가을에는 거기 갈 수밖에 없다. 군대에 있을 때, 다른 나라를 헤매고 다녔던 6년과 수술을 받고 엉거주춤 걸어야 했던 때를 제외하고 가을이면 그 산에 가서 인사하고 걷고 마주쳤다. 몇 해 전 여름에 가야산 바위에서 만났던 미국에서 왔다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한국에서 어디가 가장 인상적이었냐고. 그런 지점이 있다. 사람이 반가워지고 순간 거리가 좁혀지는, 여기 좀 앉아봐, 그러고 싶어지는 피오르드. 그의 혀는 어떻게 굴렀을까, 월 Wolchul, 월, 다시, 워~어ㄹ, 내가 생각하기에 어려운 것들을 해내는 존재들은 높아 보인다. 아무래도 오아시스 신드롬은 세계 곳곳에서 작용하고 적용된다. 나는 몽땅 '천사처럼' 바라보는 버릇이 있다. 그 낯선 이방인이 월출산이라고 그럴 때 - 특히 산 San이라는 발음이 선명해서 외국인들이 산, 산 그러면 기분이 좋아진다. - 놀랍고 반가웠다. 마치 내 정성이 드디어 빛을 보는 것 같았다. 네가 알아주니까 됐어! 그런 느낌 그런 기분, 왜 좋은지, 그리고 처음으로 그러니까 처음이다. 함께 월출산에 가본 사람들도 여럿 있지만 나는 내가 그 산을 어떤 식으로 좋아하는지 말해 본 적이 없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버스 안이었다. 내 옆에는 한 학기 미국으로 영어 연수를 온 일본 사람 야스코 이즈우미 씨가 앉았다. 처음 만난 일본 사람. 모든 나라 사람들이 특별하지만 한국인에게 일본 사람은 남다르다. 어쩔 수 없이 더 신중해진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내가 처음 만난 일본 사람이 야스코 아즈우미가 아니었다면 내가 배웠던 대로, 내가 알던 대로 일본은 저만치 피어있는 꽃이었을 것이다. 이름을 알고 싶거나 가까이 가서 향기를 맡고 손으로 만져볼 마음은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 버스 안, 아니 우리가 공부했던 강의실, 아니 그녀가 야스코 이즈우미로 나고 내가 강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던 날부터 시간을 그렇게만 흘렀던 것 아니었을까.
처음으로 버스 안에서 석양을 내내 지켜봤다. 야스코 씨도 조금 뭉클했고 나는 더 꿀꺽거렸다. 감동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위로 같았을까. 그해 2월에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오래 나누고 마침표를 아직 찍지 못한 채 그저 끄덕거리면서 달리고 있었다. 어떤 말들은 잘 들린다. 부끄럽지 않게 전달이 된다. 맑고 향기롭게, 법정 스님이 쓴 책의 제목처럼 흐르는 언어들이 있다. 처음으로 영어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그때 얻었다. 잘 배우고 싶어졌다. 그리고 일본어를 배울 수 있기를 동시에 기도했다. 내 기도는 늘 나를 기억한다. 미안하게도 너무 잘 기억한다. 어느 날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주변을 돌아다보며 스르르 눈을 감는다. 나는 잊었는데 너는 잊지 않았다는 말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또 꿀꺽거린다. 한꺼번에 많은 감정들이 솟아날 때 그것을 삼키는 일은 가슴이 맡는다. 내 가슴은 그때 행복해한다. 실컷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월출산, 누가 월출산이 좋다고 그러면 그가 좋아 보인다. 꼬시고 싶어지고 머리를 빗어주고 싶고 내가 가진 가장 맛있는 귤을 두 개 더 주고 싶어 진다. 길을 다 알려주고 싶어서 그가/ 그녀가 어색한 표정을 짓는 것도 무시한다. 오래된 것들은 그렇게 틀어진다. 나무에 결이 잡히듯이 비틀어진다.
올가을에는 신을 벗고 정성스럽게 월출산에 올라야겠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대로 견딜 만하면 산 뒤편으로 내내 그렇게 다녔으면 좋겠다. 어떻게 그렇게 다니냐고 묻는 친구에게, 마지막일 것 같아서라는 답을 보냈다. 정말이지, 오를 때마다 마지막일 것 같아서 두근거린다. 그만큼 쓸쓸해진다. 쓸쓸한 손으로 그 산에 있는 바위를 스치는 기분을 누가 알까. 잠자리 그리고 알리, 나는 알리의 노래를 듣는 지점도 있다. 거기에서 알리 노래 5번 연속으로 들으면서 걸어야, 걸을 수 있다.
여름이 한창이고 매미소리 우렁찬 것이 나쁘지 않다. 더 덥지는 말고 그쯤, 네가 됐다 싶었을 때를 나도 기다린다는 마음으로 창을 연다. 어제는 그 창으로 들어서는 기운이 2mm 약해진 것을 알았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 물었다. 여름은 다 알고 있으니까.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들의 방식이다. 알고서 까부는 것, 저만치 미리 알고 뛰어가는 것, 하느님처럼 근엄한 척해보는 것이다. 그저 고맙지. 나야 고맙지. 그 마음이 들어서 신발을 끼어 신고 호숫가에 왔다. 신발을 다시 벗고 가방에 넣어 한 손에 들고서 걸었다. 땅이 좋아한다. 발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땅이 더 좋아한다. 그러면 나가리다. 안 그런 척하고 있어야 발이 동동거리지, 바보.
보라색 꽃대를 올리면서 맥문동이 건강해 보였다. 맥문동은 볼 때마다 빨리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사람을 골탕 먹인다. 맥문동 옆으로 마삭줄이 푸르디푸른 색으로 한껏 몸을 뽐내는 보디빌더가 다 됐다. 보기만 해도 건강한 것이 물씬 풍긴다. 좋아 보인다. 왼편으로는 꽃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연잎들이 여태 본 중에서 제일 많이 펼쳐져 있다. 다들 전성기다. 한때를 지나고 있구나. 이 건강한 생명들 속을 걷고 있으니 당연히 좋았던 날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내 좋았던 날들이 그때였다는 것을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다 알고 있었다니, 나만 모르고 산 것은 아닌가 싶어 부끄러운 웃음이 났다. 그만 좀 창피했으면 좋겠는데 떠오르는 것들은 모두····· 동색同色이다.
보라가 바다를 꾸미는 데 한창이다. 신안에도 퍼플, 서천 바닷가에도 보라가 산들거릴 것이다. 여름에는 보라, 어디든 보라, 좋다.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