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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Jun 26. 2022

곡성 100일 차, 귀촌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

<11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자기 신뢰>

통상적으로 수습기간이라 하면 3개월을 칭한다. 이 배경에는 변수의 노출에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면 당연히 예상 밖의 문제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노력이 동반되어서, 이 변수들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 이를 가리켜 '적응했다'라고 한다.


100일, 2400시간, 144,000분의 시간을 살아가면 삶에서도 일에서도 기본적인 틀 안에서 마주할 수 있는 변수들은 다 마주하는 듯했다.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언제 자고 무엇을 먹는지부터 회사에서 함께 하는 동료들이 어떤 성향이고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직접 부딪히며 찾아나가는 과정이었다. 균형은 끝없이 맞지 않고 영원히 진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라면, 이 진동의 폭 차를 줄이는 게 중요하다 믿는다. 진동이 없고 완벽한 균형만 존재한다면 그건 죽음뿐일 테니.


크게 4가지의 변화가 떠올랐다. 하나의 글에 두 개의 주제를 담아내려고 한다.


1. 아버지와의 관계

2. 내면과의 대화

3. 배움에 대하여

4.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





[1. 아버지, 나의 아버지]


불과 1년 반전, 정신과 폐쇄 병동에 입원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이 모든 근원이 아버지의 양육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4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에 가고 혈혈단신 끝에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자신이 그래 왔듯 나에게도 독립적인 삶과 주체적인 행동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너무 버거웠고 결국 그 무게에 짓눌려 쓰러져버렸다. 망신창이가 된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 그 자체를 사무치게 미워했다.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가 되어버린 관계는 곡성에서의 삶을 기점으로 조금씩 실마리가 풀렸다. 각자의 집에서 각자 번 돈으로 각자의 인생을 이어나가니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다 보니 이전의  종속적인 관계보다는 고유의 삶을 살아가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서로를 대하게 되었다.


 오은영 (소아 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박사님은 말했다

.

“부모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도 알아야 하지만,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이기에 나에게 이런 상처를 주었는지도 알아야 해요. 그래야 마음의 짐을 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마음 깊이 '아, 이건 엄마라는 사람의 문제였구나. 나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던 거구나'를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내가 그렇게 사랑받지 못할 만큼 문제가 많거나 가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구나'를 깨달아 갈 수 있습니다. '내'게 문제가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에요. 부모라는 사람 자체가 가진 문제라는 것을 마음 깊이 알아차리세요. 한발 떨어져 부모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분석해 보세요. 부모는 내가 아니에요. 나는 부모가 아니에요. 부모가 못난 사람이라고 해도 나도 못난 사람은 아니에요.”

<오은영의 화해-오은영 지음>


뙤약볕에 텃밭 가꾸기를 하면서, 다른 회사의 직원으로 일하며 수많은 갈등을 보고 겪으면서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질문하고 곱씹어보게 되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과 두려움을 안고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을까. 저 억척스러움이 생존에 얼마나 필요했을까' 그 생각은 자연스레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나를 키웠을까도 떠올렸다. ‘그건 이 사람이 잘못이 아니라 이 사람이 살아온 배경이 이럴 수밖에 없는 거구나. 아버지는 자기 손으로 그 모든 걸 일구어 왔으니 내게 그토록 빠른 독립과 성장을 요구했던 것이구나.’


과거에는 경제활동에 대해 엄청나게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지금 스무 살인 시점에 고작 9,000원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시간에 공부하고 나를 갈고닦으면 9만 원, 90만 원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지금 나가서 일하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 못 하겠다.' 하지만 내 시간과 에너지를 직접 투입해서 맞바꾼 돈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건 단순히 ‘돈’을 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에너지와 시간이 돈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들과 피땀 흘려 번 돈을 소비하면서  경험하고 배운 것들은 내 돈 벌어서, 내 삶을 살아보지 않는다면 결코 해보지 못할 경험이었다. 스스로에게 더욱더 진실되는 듯했다. ‘네가 정말로 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  네가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해도 지금은 그저 시급 9,000원의 대체 가능한 접시 닦이 아닌가? 그저 여기서 접시나 닦으면서 삶을 이어나갈 것인가? 이 찬란했던 경험이 그저 신기루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이전에는 아버지라는 사람 자체에 가까이 가는 게 너무 어려웠다. 어떤 말을 해도 무슨 대답이 나올지 대략 예상이 되니 어느 순간 포기해버렸던 것 같다. 안락한 주거 환경과 지속적인 경제생활을 통해 스스로의 삶에 여유가 생기니 나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그 돌아봄은 스스로를 조금 더 명확하게 인식시켜주었다. 마치 이전에는 거대한 고목古木 밑에 가려 숨 쉬지 못했던 어리 묘목이 드디어, 저 드넓은 땅에 자신의 삶을 찾아 새로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 같다.


[2. 내면과의 대화]


2년 전 세계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했을 때였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아 유튜브 강의를 통해 알게 된 폴 김 교수님 (스탠퍼드대 교육학대학원 부학장)에게 메일을 썼고 이 같은 답장을 받았다.


“반갑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 1%도 안 되는 극히 드문 삶을 살고 계시군요. 현시대에 가장 적절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글을 읽다 보니, 일단 남들보다 월등히 잘하는 것, 즐기는 것, 끊임없이 하여도 지루하지 않은 것들을 잘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싶네요. 그리고 가지고 있는 여러 기술들도 세세히 나열하면 좋겠어요.”


처음 이 답장을 받아 들고 스스로를 향해 아무리 질문해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첨예한 관찰이 필요하다. 18살의 세계여행은 엄청난 경험인 동시에 너무나 많은 불순문들이 끼여있었고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침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2년 전 만난 한 분이 내게 '침전'이라는 단어를 건네주었다. 2년 동안 끊임없이 곱씹어봤다. 이제야 왜 그분이, 그때, 그 단어를 내게 건네준 지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것 같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년이라는 침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이 질문에 대답해보려 시도했다. 먼저 관찰에 대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지금 자신의 삶을 무엇으로 채워 나가며 살고 있는가?'라고 정의 내렸다. 시간표를 작성해보고 하나씩 돌아봤다. 영화보기, 피아노 배우기, 텃밭 가꾸기, 신문 읽기, 글쓰기, 독서하기, 운동하기, 언어 배우기로 삶을 가득 채우고 그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즐겨하고, 이를 통해 이전에 보지 못한 세상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것을 지루해하지 않았다.


곡성 포레스트, 이토록 찬란한



이것에 더해 곡성에 오면서 대답하고 싶었던 “내가 정말 요식업을 계속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답하게 되었다. 조리고등학교를 진학했지만 졸업 후 ‘이 길이 맞는가?’라는 확신이나 믿음이 든 적이 없었다. 끊임없이 의심했다. '나는 이걸 할 때 진심으로 행복한가? 이것이 정말 내가 가고 싶은 길인가?’ 지금 돌아보면 이 같은 혼란의 시작점은 결국 자아 인식의 부족이었다. 내가 나를 모르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던 것이다.


3년 만에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서 100일의 시간을 보내고 내린 결론은 ‘주방은 내가 갈 길이 아니다'였다. 이전과 다른 점은 ‘내가 틀리고 거짓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요리를 업으로 하지 않고 살아가면 조리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셰프라는 목표를 가졌던 과거의 나를 스스로 거짓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토록 사람들에게 요리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잘 안 맞는다고 하면 내가 거짓말쟁이 아닌가?’ 지금 보면 그건 거짓과 부정이 아닌 그냥 안 맞는 거였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이런 이야기 아닐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향이 있는데 모든 사람이 다 요식업에 맞을 수도 없고 맞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거봐 힘들다고 했잖아. 요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하지만 요리를 해보지 않고 맞는지 안 맞는지 판단하는 건 망상가와 무엇이 다를까.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전히 요리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더 굳게 믿었다. 그냥 성향이 다른 거고 그냥 내가 안 맞는 옷을 입었구나 싶었다. 스스로에게 ‘다른 길을 가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으니 마치 발목을 잡았던 무언가를 훨훨 털어내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여유를 가지고 삶과 적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 옆에서 조금만 코칭해주고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상당히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자기 신뢰가 생겼다. 곡성에서의 100일은 스스로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공간적 환경이 되어주었다. '역시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지!'가 아니라  과거에 경험했던 것은 얼마나 값진 것이고 현재 이를 자양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미래에 어떤 삶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세계여행을 통해 30여 개국을 다녀오고, 철인 3종을 완주하고, 첫 번째 전공이 맞지 않다는 걸 깨닫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났는데도 아직 21살이다. 나이가 깡패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필요할 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해서 필요할 때 사용하라


[3. 배움에 대하여] [4.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은 다음 글에 연재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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