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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ur Oct 17. 2021

땅에 구현된 하늘의 궁전

자금성(紫禁城)과 북경(北京)

문으로 들어서면 반대편에 다른 문이 보인다. 다시 그 문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문이 반대편에 나온다. 그렇게 몇 개의 문을 지나쳐야 비로소 천제(天帝)의 아들 천자(天子)를 만날 수 있다. 천자를 알현하기 위해 몇 달을 걸어 온 변방의 신하들에게 이 과정은 천자의 존엄을 느끼게 하는 절차였다. 사실 임금이 사는 모든 궁전은 고도로 연출된 무대다. 그러니 임금 위의 임금, 천자가 사는 자금성은 인간의 장소를 넘어서는 하늘의 장소여야 했다.

자금성을 세운 인물은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다. 영락제의 아버지 주원장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멸하고 한족 왕조를 부활시켰지만 출신은 가난한 농부였다. 더군다나 남을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강해 재위 기간 동안 수만 명의 가신과 그들의 가족들이 처형당했다. 주원장이 죽고 나서는 후계자 문제로 혼란스러웠는데, 그 와중에 영락제가 ‘정난(靖難)의 변’으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숙청이 시작됐다.


미천한 신분의 아버지에 형제를 밟고 황제가 됐으니 영락제는 자신의 존재에 범접할 수 없는 지위를 부여해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자신의 자리를 함부로 넘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금성이 황제의 권력을 보여주어 사람들을 복종하게 만드는 시각적 장치가 되기를 원했다.

자금성의 지향점은 그 이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자금성(紫禁城)에서 ‘자(紫)’는 북두성의 북쪽에 있는 별인 ‘자미원(紫微垣)’을 가리키는데, 중국인들은 이곳에 천제가 산다고 믿었다. 황제는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은 하늘의 아들이니 황제가 머무는 궁전은 자미원의 방위, 위치, 운수(運數)와 일치해야 했다. 자금성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심축을 북극성과 자오선에 맞춰 서쪽으로 2.5도 가량 기울인 이유도, 자금성의 정문 이름을 '오문(午門)'이라고 부른 이유도 모두 이 때문이다.


천자를 위한 궁전이니 일반인들에게는 금지(禁止)된 장소였다. 그래서 자금성 둘레에는 폭 52m의 해자가 둘러져 있고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도록 성벽은 높다. 하지만 이 상황을 뒤집어 생각하면 천자에게도 궁 안은 고립된 공간이다. 심지어 천자 자체가 궁 안에서 인간과는 분리된 존재여야 했다. 천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금성 안에는 나무를 심지 않았다. 자객이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궁 내 유일한 녹지는 내정 북쪽의 어화원(御花園) 뿐이다. 천자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건청문(乾淸門) 안쪽 내정에서는 천자만이 유일한 남자여야 했다.

영락제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일반인에게는 금지된 하지만 스스로 고립된 자금성을 지었다. 사실 그가 1424년 병사하기 전까지 북방의 몽골족과 수차례에 걸쳐 전쟁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금성에 있었던 시간은 짧았다. 반면, 그 후대 황제들에게 자금성에서의 삶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상황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영락제 이후 자금성은 천자를 위한 궁전이라기 보다는 천자가 필요한 집단이 만든 권력의 극장이었다.


실제 중국 역사에서 천자는 수억 명에 달하는 백성을 하나로 만드는 구심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전자에 해당하는 황제들은 영락제처럼 왕조 초반에 등장했다. 새로운 나라의 초반 황제들에게는 새로운 권력을 공고히 만들어야 하는 임무가 있었다. 그 임무는 생존이었고 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존재는 눈앞에 현실이었다. 반면, 태어남과 동시에 천자가 된 황제에게 자신이 누리는 권력은 당연이었다. 그 당연 속에서 황제가 다른 임무를 찾는다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가끔 그 피곤함을 무릅쓰고 치열하게 산 황제도 있지만 대부분은 안락함 속에서 백성과 나라의 걸림돌이 됐다.

한족은 명나라를 통해 왕조의 부활이라는 간절한 염원을 이뤘다. 그리고 영락제는 한족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인 ‘중화사상(中華思想)’과 ‘화이질서(華夷秩序)’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두 사상의 전제는 한족의 왕조가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中國)’이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나라가 중국이라면 중국의 중심에 있는 존재는 황제다. 그러니 황제가 사는 자금성은 중국의 수도, 북경(北京)에서도 중심에 있어야 한다.

북경과 장안(長安, 현재 서안西安), 그 외 중국 왕조의 수도였던 도시들과 심지어 조선의 수도 한양까지 동아시아 지역의 왕도는 하나의 배치원리를 따랐다. 서주 시대(기원전 12세기)에 쓰인《주례(周禮)》와 이후 보완된《고공기(考工記)》에는 ‘匠人管國, 方九里, 旁三門, 國中九經九緯, 經徐九軌, 左廟右社, 面朝後市’라는 내용이 나온다. 뜻은 ‘왕이 사는 도성은 사방으로 길이가 9리이고 네 변에는 3개씩 문을 설치하며, 성 안에는 동서와 남북방향으로 각각 9개의 길을 만드는데 그 길의 너비는 9대의 수레가 나란히 통과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종묘는 좌측, 사직은 우측, 조정은 전면, 시장은 후면에 배치한다’이다. 여기서 좌우전면의 기준은 왕궁이다. 국가의 주요 시설이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북경은 중국의 마지막 두 왕조의 수도였기 때문에 이런 배치가 더 뚜렷이 남아 있다. 심지어 자금성을 가운데 두고 황성-내성-외성이 차례로 둘러싸고 있고 현대에 와서 다섯 개의 환상(環狀)도로가 더해지면서 자금성을 둘러싼 도시의 겹은 더 두꺼워졌다.

1950년대에는 마오쩌둥이 황성의 정문인 천안문(天安門) 앞에 기존 관청 건물을 허물고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을 만들었다. 천안문 광장 조성은 북경을 중화인민공화국에 걸맞는 수도로 만들기 위한 마오쩌둥 도시계획의 핵심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그의 묘지를 비롯해 인민대회당, 국립대극장 등 중국을 대표하는 시설들이 있다. 그리고 천안문에는 마오쩌둥 사진과 양쪽에 ‘中华人民共和国万岁(영원한 중화인민공화국)’, ‘世界人民大团结万岁(세계 인민들의 영원한 통합)’라는 표어가 걸려 있다.


2008년에는 베이징 올림픽을 위한 경기장과 공원이 자금성에서 북쪽으로 7km가량 떨어진 곳에 조성되면서 자금성을 관통하는 남북 중심축이 더 길어졌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끝나면서 자금성은 천자가 사는 궁전의 지위를 잃고 궁궐박물관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금성은 중화사상의 시작이고 북경의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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