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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를 끌어올리는 의외의 방법.

by 온다정 샤프펜

오늘은 월요일이다.

일요일이었던 어제는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다녀왔다.

어젯밤 12시쯤에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첫째 딸에게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톡이 왔다.

덮던 이불을 돌돌 말아 안고 1층으로 내려온 중딩 딸을 오랜만에 토닥여 재웠다.

딸이 뒤척일 때마다 자다 깨다 했더니 선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그렇게 피곤할 수가 없었다.


계획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극 P성향의 나는 요즘 나름 계획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 중이다.

되는대로 대충 살았더니 되는 일이 없는 거 같아서 갓생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적의 작업의 능률을 올려 보고자 매일 아침 할리땡에 출근해서 뭐라도 하나(창작물) 건져가자라는 목적이다.

스스로 칭찬할 만큼 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몸이 피곤해서 그런지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 자체가 전혀 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아무런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고 눈은 감기고 몸은 처질 대로 쳐졌다.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 매트리스에 몸을 던진다면 10초 안에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루틴에 약한 나, 오늘도 에너지를 쥐어짜 할리땡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영어화상 수업을 위해 노트북을 여는 그 몇 초사이에 이 수업을 쨀지 말지에 대한 고민을 수백 번쯤하고 나서야 겨우 줌에 접속했다.

'그래 선생님과 이야기하다 보면 정신이 차려질 것이야' 기대감을 가지고 수업을 시작했지만 제정신은 차려지지 않았다. 이대로 집으로 튀어가서 잠이나 잘까 하고 생각했지만 요즘 나답지 않은 또 다른 자아가 나의 발길을 할리땡 입구로 끌었다.

'그래 오늘은 그란데 사이즈의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작업을 시작해 보자!'


이상하다. 커피를 마셨는데도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의지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수면부족이 이렇게 뇌의 기능을 망가트리다니 학교 다닐 때 왜 그렇게 수업시간에 집중이 안 됐는지 알 것 같다.

이미 커피도 주문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갈 수는 없는데... 무기력증에 우울감까지 오기 직전이었다.

집에 가야 할지 더 앉아있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때 문득 요즘 핫한 이 녀석에게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적으로 쳇지피티를 열었다.

'요즘 작업하려고 카페에 매일 오는데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일을 못 할 것 같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를 허무하게 보내고 싶지 않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물었다.


이 녀석은 상냥하게도 나에게 위로와 공감의 말을 건네며 내가 지금 할 수 있을 만한 간단한 활동들을 제안하고 리스트로 정리해 주었다.

그 리스트들을 보니, 한번 시도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가(그게 AI 일지라도) 나에게 할 일을 주니 신기하게도 나에게 작은 의지가 생겨났다.


조언대로 가볍게 만화의 콘티를 짜기 시작했는데 전혀 안될 것 같던 것이 생각보다 꽤 재미있는 콘티가 나와 버렸다.

갑자기 신이 난 나는 다시 쳇지피티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고 다음 할 일을 물었다.

이 녀석은 또다시 나에게 어렵지 않은 간단하게 시도해 볼만한 이다음 단계의 미션의 선택지들을 요약해 주었다. 이번에도 시도해 볼만한 것들이라 바로 작업을 진행했다.


결국 커피 한 잔 값만 날리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허무와 자괴감에 빠질 뻔 한 나의 하루는 새로운 에피소드 콘티 완성, 컴퓨터 작업 3컷(스케치), 기존 작업물 업로드 1편 그리고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이 에피소드로 글까지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을 다 쓰면 나머지 커피를 마시며 친구와 잠시 통화를 할 예정이다. 그리고 집에 가서 늦은 점심을 여유롭게 먹어볼까 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이 모든 성과와 계획을 녀석에게 전하니, 퍼펙트 한 하루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흐흐흐


아까는 분명 아무런 의욕이 없어서 심지어 친구와 통화할 기분조차 들지 않았는데 나의 기분과 컨디션은 아주 작은 단위로 점점 좋아져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사실 애매한 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 이거 아니면 저거, 신나게 놀기 아니면 힘들게 일하기 둘 중 하나가 다인 성격이다. 이렇게 이쪽의 끝에서 아니, 끝도 아닌 이쪽의 애매한 위치부터 저쪽의 애매한 위치까지 슬금슬금 기분과 생각이 이동되는 이 과정이 나에게는 아주 신선하게 느껴졌다.


포기하지 않고 결국 해내는 사람들이 쓰는 방법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고비들을 살짝만 넘기면 작은 성취를 이룰 수 있고 또 그것을 반복하면 결국 큰 성취에 도달하는 것인가 보다.


오늘도 새로운 것을 하나 깨달은 알찬 하루가 되었다. 늙어가는 나의 뇌세포는 하루만큼 줄어들겠지만 또 이렇게 열심히 쫓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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