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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다녀온 후 알게 되었다.

by 온다정 샤프펜

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했을 때 영국 런던에 다녀왔다.

나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이때까지 유럽은 가본 적도 없고 영어도 능숙하지 못하고 지도를 봐도 길을 못 찾는 심각한 길치 이기도 하고 이런 여러 가지 걸림돌이 있어서 결정하기까지 조금 망설였었다.

20대 시절부터 염원하던 영국이었는데... 이런 사소한 이유들로 망설이게 되다니, 말도 안 됐다.

사실 제일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에너지'였다. '의욕'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40대 후반의 사춘기 아이를 무려 두 명이나 키우는 전업주부는 사실 낯선 나라를 홀로 여행할 에너지 따위는 없는 것이다.


도전하고 싶은 마음 반, 매번 에너지가 달려서 하루하루 허덕이며 보내는데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돈 쓰고 개고생 할 걱정 반이었다.

다행이라면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가 영국 숙소에 먼저 도착해서 나를 맞이해 줄 거라는 것이다.

친구는 일 때문에 나와 4박을 지낸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숙소를 옮겨 나 혼자 3박 4일 여행을 계획했다.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와 숙소까지 별 탈 없이 찾아가는 것이 나의 첫 번째 목표. 그리고 친구가 떠난 4일 동안 새로운 숙소에 잘 안착하여 어설프게 짠 나의 스케줄대로 복잡한 런던의 지하철을 타고 실패 없이 그 계획들을 스무스하게 실행하는 것이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이번 여행의 미션이다.


영국으로의 여행을 계획했지만 나의 일상은 별다름 없이 흘러갔다.

아침을 만들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안일을 하고 잠시 쉬었다가 내 일(만화를 그리거나 글쓰기)을 좀 하다 보면 다시 아이들 픽업시간이 된다.

나의 대부분의 오후 시간은 아이들을 각 학원에 픽업해 주고 픽업과 픽업사이에 간식을 만들거나 큰 아이가 늦게까지 학원에 있는 날에는 장을 보고 이른 저녁을 만들어 먹이며 정신없이 흘러간다.

저녁시간에는 집안 정리와 설거지를 하고 둘째 숙제를 봐주거나 아이들의 저녁 간식을 챙겨주며 지나간다.

사춘기에 예민한 아이들은 가끔 격일로 폭발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 일일이 상대해주다 보면 잠들기 직전에는 진짜 아무 생각도 아무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내가 진짜 영국에 가는 게 맞는 것인지 반신반의한 심정으로 어찌어찌 비행기를 끊어놓고 출발 2주 전까지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가 불현듯이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영국에 갔다가 분명히 길을 잃고 개고생만 하다가 돈만 날리고 돌아올 것이다!'

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어서 남은 2주 동안 틈틈이 AI와 유튭의 도움을 받아가며 P 치고는 나름 섬세한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세우니 여행에 대한 의지와 기대감이 살짝 생겨나긴 했지만, 여전히 에너지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최근에 나의 상태는 부쩍 사춘기 짜증과 불안증이 심해진 두 딸에게 시달려 많이 지쳐있었다.

만화를 그리거나 글을 쓰는 작업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인데(게다가 마감도 없고 돈이 되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동기부여가 힘들다) 거의 아이들을 24시간 밀착마크하는 나의 생활패턴으로는 창작에 쓸 에너지가 턱없이 모자란 느낌이다.

결국 이도저도 제대로 안 되는 날엔 의욕은 더더 떨어지기도 하는데 이 와중에 영국여행이라니... 내 주제에 이 상황에 '이게 맞는 것인가'에 대해 수백 번 생각하게 된다.


드디어 그날은 왔고, 예정대로 난 홀로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14시간이 넘는 비행은 진짜 고역이었지만, 이미지 트레이닝을 많이 하고 가서 그런지 이번에는 그럭저럭 잘 시간을 보내고 무사히 히스로 공항에 도착했다.

막 영국에 도착했을 때 eSIM연결에 문제가 생겨 인터넷이 안되어 잠시 당황하였지만, 무사히 전철을 타고 친구가 있는 숙소까지 잘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의 작은 도시 한 구석에서 매일 같은 일만 하며 살던 내게 낯선 도시,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이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갑자기 쏟아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14시간 비행과 시차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웬걸 나는 저 발가락 끝부터 머리털 한 올 한 올까지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인간은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나 보다.

살아있다. 난 아직 살아있다. 그리고 꿈에서나 간간히 보던 학창 시절 정다운 친구가 옆에 있으니 마치 힘이 넘쳐흐르고 파릇파릇했던 때의 나로 돌아간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신기한 경험은 내가 보는 장면하나 경험하나 하나가 인상적으로 남아 머리에 새겨지는 느낌이었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그만큼 1분 1초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주택가의 창이 빽빽한 건물들은 너무나 이국적으로 아름다웠고 이 세상의 모든 예술작품을 모아 놓은 것 같은 뮤지엄 안에서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했다. 한국에 있던 두 아이의 엄마는 여기에 없었다. 그냥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그것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몸을 맡긴 채 유영하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친구가 떠나고 나 혼자 남았다.

왠지 더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이번엔 더 큰 챌린지다. 나 혼자 이 낯선 도시를 얼마나 잘 즐길 수 있을 것인지 기대가 되었다.


혼자 여행 첫날은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을 보았다.

둘째 날은 기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가보았다.

셋째 날은 20대 시절 막연하게 가고 싶었던 영국의 아트스쿨과 영국도서관에 갔다.

넷째 날은 차이니즈 레스토랑에서 처음 먹어보는 중국요리를 먹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나의 이번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길을 잃지 않고 주도적으로 내가 계획한 일정들을 하나하나 클리어할 때 큰 희열이 느껴졌다. '자기 효능감'이라고 하던가. 나는 새삼 나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리고 여행을 끝내고 일상에 복귀했을 때 난 오히려 전보다 컨디션과 텐션이 훨씬 좋아진 것을 느끼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 전에 느꼈던 나의 고민들... 쭈그렁 마음들이 작은 먼지처럼 느껴졌다. 무겁고 때 묻은 옷을 벗고 예쁜 새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난 내 상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냥 애들 케어하느라 에너지가 조금 부족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후 알게 되었다.

'나는 사실 많이 지쳐있었구나. 힘들었었구나. 그래서 에너지를 쥐어짜도 나오지 않았던 거구나'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도 힘이 안 난다고 느낄 때 주저 없이 나를 돌아보고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해주어야지!'라고 말이다.


난 오늘도 생각한다.

내가 제일 소중한 존재이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뭘까에 대해 끊임없이 매일매일 연구하고 생각하자. 절대 이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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