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영국에 다녀온 후, 꽤 오랫동안 해 오던 필리핀 선생님과의 화상 영어수업을 그만두었다.
여행을 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만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심지어 2개월의 수강료를 미리 지불해 놓고 한 달 분량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몇 년 동안의 수업 중에 간간히 수업을 쉴 때도 있었지만 작년에 3주 동안 말레이시아에 갔을 때도 쉬지 않고 수업을 이어나갔을 정도로 이 수업에 진심이었다.
물론 언젠가는 끝을 내야 할 텐데...라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다. 화상영어수업이라는 것이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영어책을 붙들고 열심히 하지 않는 한 영어실력이 확 느는 수업은 아니었다. 같은 선생님과 거의 매일 같은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25분이 허무하게 흘러간다. 다음날도 역시 비슷한 대화를 이어나가다가 수업이 끝나버리곤 한다.
필리핀 사람인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었다. 아침마다 항상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겨주었다. 한때 사람들한테 치여서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시기가 있었는데, 싫다 싫다 해도 사람과의 대화가 그리웠었다. 그때는 선생님과의 짧은 일상토크가 정신적으로 힘이 되어주었었다. 나에게는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이다. 게다가 얼마 안 되는 나의 수업료가 선생님에게는 꼭 필요한 돈이었다. 선생님은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했는데 의사가 꿈인 소중한 그 아이를 키워내기 위해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수업료는 선생님과 딸의 꿈을 이루는데 조금 일조하고 있었을 것이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던 주제에 왠지 이마저도 그만두게 되면 결국 영어를 정복하지 못하고 도망치게 되는 것 같아서 그만 두기 싫었다. 그리고 이제 친구처럼 편해진 선생님과의 인연이 끊기는 것도 두려웠다. "영어를 마스터하게 되면 그때는 그만둘 거야. 올해까지만... 올해까지만 "했던 것이 지금까지 세월이 흘러버렸다.
결국 나의 영어실력은 마스터는커녕 하루하루 하강하는 지지부진한 상태로 선생님한테는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 작은 희망(영짱이 되리라는)과 선생님과의 정을 끊지 못했다.
여행을 가기 전날 선생님과 아침수업을 하면서 일주일 후에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여행이 끝난 후 엄청나게 피곤했지만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영어로 말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만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더 버벅거리게 된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25분이 어물쩍 흘러갔다. 이날은 문장은커녕 쉬운 단어조차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머리가 안 돌아갔다.
난 몇 해째 똑같은 인사말 '헤브 어 나이스 데이'를 말하고 채팅창을 껐다.
그리고 이제는 뭔가 결단을 내려도 될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영국에 다녀오기 위해 그동안 수업을 받았던 것처럼 영국에 다녀오자마자 이제 영어수업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날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까 하다가 말로는 잘 표현하기 힘들 것 같아. 미안하게도 긴 장문의 메일로 대신했다. 다행히 상냥한 선생님의 답장을 받아보니 나의 지금 상황을, 그동안의 나의 노력을 알아준 것 같다.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마 그만두더라도 분명히 후회하거나 많이 아쉬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만두고 하루 만에 이렇게 마음이 깨끗하게 편안해질 줄이야. 아직도 내가 잘 모르는 나의 마음들이 내 속에 많이 있는 것 같다.
영어에 대한 나의 마음이 질척거림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데에는 분명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중 하나는 이것이 아닐까 싶다.
이번 여행에서 일정을 하나 세워둔 것이 있었다. 런던에 있는 아트 스쿨 투어(?)였다. 투어랄 것도 없이 혼자 학교를 찾아가서 학교가 어떻게 생겼는지 학생들은 어떤 사람들이 다니는지 그저 궁금해서 살짝 보고 올 심산이었다. 물론 학생증이 없어서 건물 안까지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항상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학교를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뭔가 '아 이런 느낌이구나'하고 속이 시원(?) 해지는 느낌이었다.
20대 후반, 디자인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다른 부서의 친한 여동생이 갑자기 사표를 내고 영국에 아트스쿨에 진학해 버렸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놀랍기도 했고 이미 준비가 다 된 그 아이가 부럽기도 했다. 그에 비해 나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영어도 못하고 나이도 많고 돈도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기회가 되면 나도 언젠가 영국에 아트스쿨에 가고 싶다'라고 막연히 꿈을 꾸었는데, 결국 꿈은 꿈으로 끝나버렸고 정신 차려보니 애 둘을 키우는 주부가 되어있었다.
그때 영어를 못해서 학교를 못 갔다!라는 생각이었는지... 영어를 잘하게 되면 혹시 나중에 유학을 갈 기회가 올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어느 순간 외국에 나갈 때마다 영어를 못하는 것이 부끄럽고 불편하다!라고 느껴서인지 몰라도 어찌 되었는 최근까지 영어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영어를 미련 없이 내려놓은 계기가 된 나 홀로 영국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을 정리하자면...
첫째는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여행은 할 수 있다.
둘째는 영국의 아트스쿨(그 아이가 다녔던)은 이렇게 생겼구나.(궁금증 해소)
셋째는 길치인 나도 구글맵을 잘 이용하면 가고 싶은 곳을 무리 없이 갈 수 있다.
넷째는 여행이라는 것은 묵혀있던 나의 생각들을 새롭게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던 영어공부를 이제는 좀 놓아주고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쓰면 내 인생이 더 쾌적해질 거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들었다.
영어를 떠나보낸 첫날 생각보다 가뿐한 아침을 맞이하는 나를 보며, 또 성장했구나 느낀다. 이렇게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어떤 방향으로든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 감사하고 신기하다.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업데이트가 되는 나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