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 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우린 어차피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와보니 현재였고 그렇게 미래도 온다는 걸 작가는 우리에게 고백하듯 말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 실망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실망이 오른쪽으로 돌면 기대도 함께 돈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텝도 작다.
늘 그랬다. 인간관계에선 기대가 앞서다 결국엔 실망이 오고 그 실망이 지속되는 어둠 속에서 다시 기대가 피어오른다. 이 감정을 글로 풀어내지 못했는데 언어로 풀어쓴 작가의 필력에 감탄했다. 인간에게 기댈 건 못된다 하지만 우리는 또다시 인간을 찾는다.
그러나 영어반 시절에서 가장 많이 떠올리는 장면은 역시 유인물을 넘겨주며 내게 상냥하게 말을 건네던, 전교 학생회장의 ‘부드러운 적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환대보다 적대를, 다정함보다 공격성을 더 오래 마음에 두고 기억한다.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
이 감정 또한 언어로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나의 착각으로 돌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늘 그들은 필요할 땐 선한 동지로 필요 없을 땐 철저한 타인으로 아웃사이더들을 구분 짓는다.
역시 작가는 작가다. 늘 마음속에 생각했던 것을 이렇게 글로 잘 풀어내다니
한 번뿐인 삶이라는 게 자명한데도 우리의 삶은 그걸 잊고 산다.
작가는 이 책을 너무 일찍 낸 거 아닌가 걱정하는데 내 생각엔 좀 더 일찍 냈어야 했다. 나도 그와 비슷한 시기의 학장시절을 보낸 터라 인생의 전환점을 느끼던 때가 오십이 넘어가는 시점이었으니 그 역시 예전과 달라진 것들의 징후가 그때쯤부터 나오지 않았나 싶다. 하나를 파지 못하고 이것 하나 저것 하다 하는 것.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생두를 볶다가 화재경보기 울려 대피한 실험정신과 학교를 또래보다 빨리 가서 체격이 작았던 이야기 등 어찌 그리 나랑 비슷한가 해서 공감이 갔다.
이 책에는 그가 전에 하지 않았던 어머니와 아버지이야기가 나온다. 작가의 어머니 또한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러하듯 자식에 대해 잘 안다는 듯한 의기양양함. 하지만 자식은 부모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오한 존재임을 부모들은 모른다. 그렇다고 그가 부모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다. 묘한 생물학적 주인인 부모의 빛바랜 셀카 속의 눈빛은 사진을 통과해 미래의 작가를 통해 다시 되돌아가는 그 묘사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 문제인 죽음이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건 인간 모두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결말하나다. 살면서 고통을 인식하는 자세에 대한 것도 자칫 까먹을 뻔했다. 인간실존 자체는 고통이다. 무덤 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우리는 고통을 너무 죄악시한다. 고통받으면 끝이라는 듯. 그래 고통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에 따르면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이 길을 안 갔으면 어쩔뻔하는 이 길을 갔으면 하는 가정 같은 것도 의미없다. 그냥 우리 인생스토리는 결말에 따라 거꾸로 유추하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 그가 지금 소설가가 된 것도 소설가가 되고자 했던 것도 아니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처럼. 두고두고 삶에 대해 자만심이 들거나 불만족스러울 때 성경처럼 옆에 두고 읽을만한 책이다.
나의 실수였다. 대학생 딸앖에서 "오늘 이 책 읽었다"하고 공중에 흔들며 자랑하는 순간 뺏겼다. 한 권을 더 사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만큼 강추하는 책이다. 반백살 산 소설가가 바라본 인생이니 얼마나 알찬 내용이 많겠는가. 내용이 다 알차서 전부를 다 기억할수 없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