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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May 22. 2017

존 스타인백, 분노의 포도

영혼을 키우는 저항의 열매

존 스타인백은 참 잔인한 작가다. 그는 끊임없이 주인공들에게 시련을 안긴다. 거대한 모래 폭풍, 떠돌이 생활, 잔인한 대공황기의 자본주의, 가족들의 죽음과 헤어짐, 노예보다 못한 농 업 노동자들의 고용환경. 그리고 한 푼도 남지 않은 순간에 몰아치는 홍수까지. 어떻게 한 인간이 이 모든 것을 견뎌야 한단 말인가? 참으로 부당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모든 부당함을 견뎌내는 한 가족을 생생하게 그려냈기에 그는 위대한 작가라고 할 수다. 그들이 -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 실재하는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자연과 자본주의에 밀려나는 사람들   

John Ernst Steinbeck (1902 – 1968)

  

[분노의 포도]는 거대한 모래바람으로 시작된다. 사방에 어린아이 키 보다 높게 모래를 쌓아 놓고 사라진 바람. 농작물은 모두 그 속에 묻혔다. 농부는 할 수 없이 은행에 빚을 졌는데 연이은 흉작으로 땅을 빼앗긴다. 그럼에도 농부는 그 땅의 소작농이 되어 똑같이 씨를 뿌리고 수확을 기다렸다. 그런데 모래바람보다 더한 녀석이 농부를 향해 달려온다. 트랙터! 은행이 보낸 그 거대한 기계는 수많은 농부들이 삽과 괭이로 일구던 밭을 혼자서 갈아엎고는 농부의 집마저 밀어버렸다.


미안합니다. 우리가 그러는 게 아니잖아요. 괴물이 시킨 겁니다. 은행은 사람하고 달라요.

그렇지만 은행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거잖아요.

아니, 틀렸어요. 틀렸어. 은행은 사람하고 달라요. 사실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은행이 하는 일을 싫어하지만 은행은 상관 안 압니다. 은행은 사람보다 더 강해요. 괴물이라고요. 사람이 은행은 만들었지만, 은행을 통제하지는 못합니다.(5장)     


은행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는 통제되지 않는다. 그들은 계약서와 법은 알지만 인간을 모른다. 땅과 집을 빼앗기는 인간의 삶은 물론 자신을 도와 빼앗는 사람의 마음도 돌보지 않는다. 그렇게 이윤을 쫓아 달린 결과 자본주의는 공황에 다다른다.


1935년 텍사스의 모래 폭풍 https://en.wikipedia.org/wiki/Dust_Bowl

1930년대에 미국 중부에 몰아닥친 모래바람과 금융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대규모 농장들은 수많은 농민들을 떠돌이 농업 노동자로 만들었다. 비참한 환경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언론을 통해 가시화되지 못한 채 ‘오키’(오클라호마에서 땅을 잃고 이주한 사람들을 비하하며 부른 호칭)라고 놀림을 받으며 부랑자 취급을 받았다. [분노의 포도]는 그들의 문제를 미국 사회에 드러나게 했다는 점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1936년 모래 폭풍이 지나간 달라스 1936 https://en.wikipedia.org/wiki/Dust_Bowl

     하지만 이 작품을 단순하게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르포 문학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이 작품의 탁월함은 오히려 처참한 상황에 처해있던 이주자들을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한 위대한 인간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가난하지만 불쌍하지 않고, 처참한 상황에 있지만 존중받아 마땅한 민중들. 그들은 어떤 경제학자보다 명확하게 착취와 소외에 대해 이해하고 있으며, 어떤 철학자보다 뜨겁게 인간 존재에 관해 고민한다. 톰 조드와 그의 가족은 그런 위대한 민중을 대표하고 있다.



분노의 열매     


톰 조드는 트랙터에 밀려 농부들이 땅에서 쫓겨나고 있는 상황을 알지 못했다. 술자리에서 자신을 칼로 찌를 친구를 삽으로 쳐서 죽인 죄로 지난 몇 년간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반성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든 누군가를 죽인 일은 분명 나쁜 일이지만 '죄'라고 할 수 없다. 살아있는 이상 죽음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톰은 착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의 말마따나 그는 이미 착한 아이였다. 그는 항상 가족을 위하고 이웃의 상황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위협을 당했을 때면 움츠러들기보다 분노한다. 그에게 저항은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는 본능이다.


톰 조드는 감옥에서 나와 살림살이가 실린 털털거리는 자동차에 올라 가족과 이주를 시작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한 때 총을 들고 인디언을 내쫓던 정복자였으나 이제 은행과 기계에 밀려 쫓겨나는 도망자가 되었다. (백인이 아닌 동양인이 보기엔 이것은 약간의 인과응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암튼) 가장인 아버지의 손에 들린 희망은 과일을 딸 인부를 구한다는 전단지 한 장과 언제든 일할 수 있는 건장한 아들들이다. 사시사철 과일이 익어간다는 캘리포니아가 조드 가족에겐 가나안 땅이었다.


Dorothea Lange's 1937 photo of a Missouri migrant family's jalopy stuck near Tracy, California.


전단지에 쓰인 대로 캘리포니아에는 과일도 많고 일자리도 많았다. 그러나 일자리를 찾는 가난한 떠돌이들이 더 많았다. 50명이 필요한 과수원에 100명의 일꾼이 찾아오면 임금은 반으로 깎이고 노동할 수 있는 날도 반으로 줄어든다. 사막을 건너 오클라호마까지 뿌려진 전단지와 이주자들의 천막촌들을 찾아다니며 인부를 모으는 중개인들은 그런 이유로 생겨났다.


톰의 가족들은 정말 먼 길을 달려왔고, 정말 열심히 일자리를 찾았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럼에도 아이가 굶주림에 병들어 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정말 열심히! 이것만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불행히도 21세기 한국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다.) 이런 부당한 상황을 저자는 통렬한 문장으로 그려낸다.


사람들이 강에 버려진 감자를 건지려고 그물을 가지고 오면 경비들이 그들을 막는다. 사람들이 버려진 오렌지를 주우려고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몰고 오지만, 오렌지에는 이미 휘발유가 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감자를 바라본다. 도랑 속에서 죽임을 항해 생석회에 가려지는 돼지들의 비명에 귀를 기울인다. 산처럼 쌓인 오렌지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지켜본다.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 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 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 간다.(25장)


‘분노의 포도’. 그 포도는 사람들의 영혼을 채운다. 그것은 배를 불리는 양식이 아니라 영혼을 채우는 열매다. 예수의 희생을 상장하는 포도주처럼, 분노의 포도는 죄 없는 이들이 희생 중에 얻는 깨달음을 상징한다. 스타인백은 깨달음이 분노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민중이 지금 상황이 부당하다는 것에 분노하지 않으면 그 열매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분노의 방향     


존 스타인백이 보기에 민중의 분노는 다스리고 조절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을 움직이는 마지막 힘이다. 이런 주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내는 문장은 거대한 모래바람이 남기고 간 끔찍한 흔적을 바라보는 농부의 가족을 묘사하는 서두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 지켜보던 남자들의 얼굴에서 망연한 표정이 사라지고 강인함과 분노와 저항이 나타났다. 여자들은 이제 남자들이 주저앉지 않으리라는 것, 위험이 지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1장)     


인간은 자연을 향해서도 이렇듯 분노하고 저항한다. 땅을 갈아엎고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것이 농부의 저항이라면 가난한 이웃과 연대하고 함께 행동하는 것은 노동자 시민의 저항이다. 아니 그것은 살아있는 이들의 의무다. 그 의무를 저버린다면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적인 삶’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1939년 초판본 표지 https://library.syr.edu/digital/exhibits/g/GrapesOfWrath/

스타인백은 작품 속에 자본주의의 잔혹한 현실에 체념하고 스스로 부역자가 된 이들을 그린다. 그 대표적인 예가 농장에 고용된 직원들이다. 그들은 농장 매점에서 식료품과 생필품들을 터무니없는 비싼 값에 판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물건이 비싸다며 투덜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여기서 사기 싫다면 기름을 써가며 도시까지 가라”고 놀려댄다. [분노의 포도]에 등장하는 가장 위대한 인간인 톰의 어머니는 그들의 속내를 간파한다.


“이런 더러운 짓을 하고 있잖아요. 스스로가 창피하죠? 그래서 약은 척할 수밖에 없는 거죠?”

어머니이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점원은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 어머니는 그를 지켜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됐어요?”
“먹고살아야 하니까요.”(26장)    

 

매점 직원은 ‘먹고살아야’해서 부당한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 역시 인간인지라 마음이 편할 수는 없다. 그래서 비루한 자신에게 나는 짜증을 이웃에게 전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톰의 어머니가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버렸다. 그녀의 아들이 한때 살인자라고 손가락질받았던 톰이 아니었다면, 가족과 함께 가난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알지 못했다면, 그녀가 수많은 가족들을 배려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오지 않았다면 그럴 수 없었으리라. 그녀가 그렇게 ‘나빠 보이는’ 사람들의 '착한' 본성을 알아차리자 그도 마음을 움직여 조드 부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는 그렇게 '나'를 넘어 '우리'로 도약한다.  그렇다면 곧 사회도 도약할 것이다.

    

두 남자는 이제 혼자 있을 때만큼 외롭지도 않고 당혹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이 최초의 ‘우리’로부터 훨씬 더 위험한 것이 자라 나온다. (……) 밤이 내린다. 아기는 감기에 걸렸다. 자, 이 담요를 가져가. 양모 담요야. 우리 어머니 것이었지만…… 아기를 위해서 가져가. 이것이 폭발의 시초다. 이것이 시작이다. ‘나’에서 ‘우리’로 변하는 것이.(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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