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엄마 패치' 붙이니 세상이 달라보이네
Q. 조리원에서도 그렇고, 아기랑 사진 찍으러 스튜디오에 가도 저를 '엄마'라고 불러서 어색해요. 적응되면 괜찮아지겠죠?
A. 저도 그게 신기했어요. 본인들의 엄마도 아닌데 왜 '어머님'으로 부르는지...아무튼 저도 누군가에게 '엄마'라고 불리는 '아줌마'임을, 출산 후 3개월 뒤에야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 외에 영 적응되지 않았던 여러 인지 부조화들은 이제부터 소개할게요.
시간이 흘러 아기는 어느덧 두 돌을 앞둘 만큼 훌쩍 컸다. "클수록 더 힘들어질 것"이라던 육아 선배의 말과 달리, 아기는 돌 전까지 순하고 무탈하게 자랐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아기가 태어난 이후 새로 부여된 '엄마' 역할을 맡으며 느꼈던 감정을 블로그에 기록한 적이 있다. 산후조리 기간에 '엄마 패치'를 붙인 이후 느꼈던 바를 아래와 같이 옮겨 봤다.
1.
2개월 된 아이를 키우며 가장 힘든 건 부모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의 내가 당신들에게 했던 행동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아주 너 혼자 큰 줄 알지", "너도 부모 돼 봐라. 그때 엄마 마음 알 거야." 이런 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한 귀로 흘렸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입장이 됐다. 이제라도 잘하고 싶은데 여전히 부모님은 내 걱정만 한다.
2.
엄마가 2박 3일 동안 내 신혼집에 산후도우미로 지원을 나왔다. 엄마는 내가 한사코 거절했던 우족을 사 와서 일일이 국물을 내고, 손질하기 어려운 부추 비슷한 야채를 간간한 양념에 버무려 식탁에 올리셨다. 그러고는 왜 서서 식사를 하냐고 묻는 내게 당신은 설거지거리를 줄이려고 그랬다면서 당신의 어머니도 그렇게 했다고 하셨다.
엄마는 나를 가진 지 34년이 지났다. 육아 트렌드나 의학 정보는 그새 많이 달라졌다. 파우더는 발진이 나는 피부에 바르기에 건조하며, '참젖'이나 '물젖'이라고 하는 시쳇말은 '전유'와 '후유'라는 공식적인 명칭이 생겼다.
하지만 정작 본질이 바뀌지는 않았나 보다. 발진이 날 것 같은 아기의 피부에 파우더를 발라야 한다는 당신의 말에, 나는 요즘엔 파우더 같은 건 바르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내내 파우더를 대체할 만한 발진 방지 대책을 고민했다. 모유수유 자세를 봐준다면서 아이와 나의 수유 행위에 거침없이 손으로 개입하는 엄마에게 신경질을 내면서도, 결국은 엄마가 하라는 대로 다리를 지렛대 삼아 아이의 머리를 괴고 수유를 하고 있다. 엄마가 자주 보는 소변과 대변조차 예쁘다고 하고, 큰 소리로 얼러주자 아기는 그전에 짓지 않던 웃는 모습의 배냇짓을 했다. 이 웃음에 정말 사회적 속성이 없을까.
"커서 엄마 많이 도와줘라." 엄마는 나의 아기에게 말했다. 아기의 외할머니는 결국 아기 엄마의 엄마였다. 엄마가 되기 훨씬 전, 뱃속에서부터 그 존재를 사랑해온 사람이었다. 나를 낳은 후 당신의 외할머니는 시골에서 올라와 2주 동안 산후도우미 역할을 했다면서 이제는 그 마음을 알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아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본다고 해서 쉽게 알 수 없는 감정이 아니었다.
3.
한 사람과 가까워지려고 할 때 느끼는 두려움이 있다.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정서적 공간에 그를 들이면 그가 나를 해칠지도 모르기에,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그것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이 영역에 누군가를 들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 들어오려는 이가 있다. 얼마 전에 내게 온 아기다. 아이와 엄마로 관계 맺은 지금 이 시간 이후로, 내가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조금은 용기를 내볼 만한 지점은 있다. 이 정서적인 공간에 아기를 들여놓게 된 계기로, 다른 타인 역시 이 곳에 들일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그것이다. 동시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혈연이나 지연으로 묶인 사이에서 내 감정과 안위만 앞세워 나 홀로 평온하기 위해 애쓰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때 잘못 형성된 방어기제다. 이 습관이 조금은 고쳐질지도 모르겠다.
4.
요즘 꾸는 꿈에는 가까운 지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 중 몇몇은 나와 화해하고, 다른 몇몇은 나를 비웃어서 꿈에서 깰 때쯤이면 기분이 확연히 달라진다. 실제 그들과 나의 관계와 무관하게, 내가 중요하다고 여겼던 가치의 우선순위가 재편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5.
엄마에게도 엄마가 될 준비가 필요하다. 생물학적 나는 오로를 배출하고 젖을 만듦으로써 그 준비를 끝낸 것 같은데, 사회적인 나는 이 역할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내 개인 생활보다 아이를 잘 먹고 잘 재우는 일을 우선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그런 대단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보다 당장 산후 몸매 관리나, 수면교육을 통해 아이를 수월하게 기를 생각부터 든다. 아이가 100일까지는 계속 잠을 자지 못하게 될 거라는, 육아 선배들의 경험담을 듣고 나는 겁에 질려 있다.
6.
엄마라는 역할에 조금씩 적응 중이다. 흔히 엄마, 타인에게는 ‘아줌마’라고 불리는 이 정체성이 나는 편하지만은 않았다. 타인에 대한 과한 개입이 부담스럽게 느껴져서다. 조리원에서 이른바 ‘동기’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려다 보니, 그 개입은 타인의 고통 혹은 즐거움이 나의 것과 다름없다는 공감의 연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에 대한 반응 혹은 개입은 아이와의 상호작용에서, 혹은 그 가정에서의 희로애락을 아는 존재에게 보내는 공감과 위로의 메시지다.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모임에 발을 들여 공감하고, 위로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지지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