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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해서 살아남은 이야기

씨리얼이 10년을 버틴 비결을 묻는다면

by 윤지나


그저 살아남았다. 이게 현재 <씨리얼>에 대한 가장 정직한 설명일 지도 모른다.
어마어마한 조회수가 연일 기록되는 것도 아니고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쇼킹한 콘텐츠가 잊을 만하면 나오는 것도 아니다. 탄핵 심판 국면에서 개인 유튜브를 만들자마자 10만 명을 모은 김계리 변호사 같은 유명인이 출연한 적도 없다. 악명조차 부러워 김계리 예를 들어 버렸다. 이 글을 읽는 콘텐츠 생산자라면 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여하튼 그런데도,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CBS의 유튜브 채널 <씨리얼>의 '성공'에 대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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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를 타깃으로 한 시사 콘텐츠


우리가 성공했는가? 성공했다면 무엇이 성공의 지표로 여겨지는 것인가? <씨리얼>이 여러 방식으로 콘텐츠 시장에서 호명될 수 있는 건 ‘살아남은 방식의 희소성’ 때문이라는 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다. 이런 주제를 다루면서 시사 콘텐츠를 만들어 10년 장수를 했다는 것, 그것도 뉴스에 관심 없다는 MZ들을 주 타깃으로 버티고 있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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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시청층이 2030인 유일무이 정치•사회 유튜브 채널


<씨리얼>은 지속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비주류의 이야기를 다뤘다. 히키코모리와 장기 백수들, 수능 중독자들, 우울증 환자, 낙오된 1020 청년들··· 힘을 숭배하고 승리를 찬양하며 도파민을 추구하는 콘텐츠의 무지막지한 흐름 속에서 쉽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어려운, 어쩌면 매력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는 세상의 단면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나 라디오라는 현존 최고(故) 레거시 미디어 회사인 CBS에서 이런 식으로 소재를 선별한다는 것은, 그게 시사 맞냐는 질문을 주기적으로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거시 매체에서 가치 있는 소재란 내용 그 자체가 ‘new’한 뉴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9시 뉴스>에서 차례대로 배열되는 뉴스 같은 것 말이다. 이런 내부적 요구에 <씨리얼>이 나름의 반항을 하다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정이 참 많이도 생겼다.

신기하게도 <씨리얼> 기준 역대급 조회수들은 이런 뉴스 같지 않은 제작물, 비주류의 이야기에서 많이 나왔다. 화려한 화면 밖 대체로 어두운 세상에는 진짜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콘텐츠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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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이야기를 담은 유튜브


정보보다 맥락으로, ‘씨리얼스럽게’


눈물을 뿌리면서 소재 선정, 뉴스 선별을 한 다음, <씨리얼>은 이런 세상을 최대한 ‘필사적으로’ 재밌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MZ들이 재밌어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니까. 기존 시사 채널의 정보 전달식 문법보다는 맥락을 전달하려고 애쓴 게 그 구체적 내용이다. <씨리얼> PD들은 씨줄과 날줄로 된 정보들을 엮어 그럴듯한 면직물 만들어 내는 걸 천형처럼 여긴다. 영상적 관점에서 포인트를 어떻게 줄지, 누군가를 희화화하거나 옳지 않은 방식으로 묘사하지 않되 충분히 유쾌한 자막을 어디쯤 넣을지. PD들은 맞붙은 책상 위에서 내가 귀를 막고 성질을 낼 때까지 편집 내내 떠든다.


올해 새롭게 내놓은 ‘뉴스 지나갑니다’ 시리즈는 이런 기조 위에서 계엄과 탄핵, 대선 국면에서 정치 이슈를 다뤄 나름의 성공을 거뒀다. <씨리얼>이 고집스럽게 내세운 가치는 비주류였지만, 그럼에도 시류를 타면서 이런저런 주제를 많이 다뤘었는데 ‘뉴스 지나갑니다’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앞서도 씨리얼 ‘정치수업’이라는 이름으로 시즌제 정치 소재 제작물을 만들었었다. 계엄에 탄핵에 대선까지, 지금은 정치 시사지! 라며 바람 불 때 연을 날리자는 기획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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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지나갑니다’ 화면 갈무리


대신 ‘씨리얼스럽게’ 하자는 게 우리의 목표였다. 우리가 판단한 한국 정치 콘텐츠 지형은 정치 고관여층 중심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었다. MZ로 대표되는 정치 저관여층은 초 단위로 쏟아지는 정치 콘텐츠를 따라가기 벅찼다. 더욱이 이 콘텐츠들은 당파성을 강력한 자양분으로 삼고 홍수처럼 쏟아졌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데이터에도 불구하고 딱히 정치색이 없는 스윙보터(swing voter) MZ들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씨리얼>은 정보를 취사선택해 맥락을 짚으면서도 고관여층도 수긍할 만한 어떤 통찰을 보여주자. 마침 <씨리얼>을 포함해 CBS 보도국 소속 유튜브 채널의 관리자 격이자 정치부 경험이 있던 내가 이 부분에서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나는 ‘뉴스 지나갑니다’에서 센터장이 아닌 제작진 내 기자 팀원이 돼 브리퍼 역할을 맡았다.


‘왜’라는 접근, 새로운 정보가 되다


일단 소재에 대한 접근 방식을 달리했다. 예를 들면 당시 여당이던 국민의힘이 윤석열과 절연하지 못하고 한덕수와 김문수가 싸우는 상황은, ‘계엄 이후 국민의힘의 뇌 구조_상황 인식’이라는 틀로 설명하는 식이다.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인 상황에서 민주당은 ‘이재명은 어떻게 금강불괴가 됐는가’에 집중했고, 개혁신당은 이준석이라는 정치인이 가진 기존 정치인과의 차이, 그 독특함의 정체에 천착했다.
가장 성공적이었던 건 정의당 권영국 편이었는데, 저관여층 입장에서는 가장 생소한 정보를 소수정당 후보의 필요성과 함께 엮은 것이 주효했다. 저관여층 입장에선, 처음 보는 정치인이 대선 토론회에 나와 레드카드를 들고 소리를 지르긴 하는데, 그가 누군지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지 알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씨리얼>의 시류 타기란 바로 이런 것!
‘사회부 소속인 기자가 권영국 전화번호가 없으면 일을 제대로 안 하는 것으로 봐야 했다’는 기자의 경험적 설명, 왜 언론이 그동안 권영국과 정의당에 집중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솔직한 고백 등은 시청자들이 좀 더 인간의 얼굴로 사안을 바라보게 하는 데 적합했다. 언론이 어떤 게이트키핑 과정을 거치는지 일종의 ‘사정’에 대해, 심지어 슬픈 얼굴로 설명하는 것은 기존 뉴스 시사 콘텐츠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시청자들에게 이런 설명은 새로운 정보로 받아들여졌고, 권영국과 그의 정당이 놓인 상황을 설명하는 데 적절한 전달 방식이었다.

차례로 정당 편을 내보낸 뒤 마련했던 여야 출입 기자 초대석은 기대를 훌쩍 뛰어넘은 성공이었다. 채널 연령대와 비슷한 기자들이 화자가 돼서 또래의 시선과 화법으로 정치 상황을 하소연하듯 알려줬다. MZ 시청자 입장에선 넥타이 맨 정장 차림의 남성들만 보였던 정치 콘텐츠에 내가 자주 쓰는 어휘를 구사하며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여성 기자들이 나오는 게 신선했던 것 같다. 여기에 웬만한 예능 유튜브를 섭렵하며 필사적인 드립성 자막 내공을 퍼부은 막내 PD의 공이 특히 컸다.
이 시기 대부분의 정치 콘텐츠는 될 사람, 그리고 그와 대적하는 사람, 변수가 될 사람 위주로 꾸려졌을 뿐 아니라 기존의 문법대로 최대치의 갈등, 최대치의 자극을 추구했다. 그에 비하면 ‘뉴스 지나갑니다’는 삼김시대에 키신저, 등소평까지 얘기하며 지나치게 맥락을 구성했다.
맞붙은 최대치 갈등을 전시하면서 우리 언론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알리바이를 세우는 대신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갈(喝)!도 서슴지 않았다. ‘감히!!!’ 이렇게 시선을 드러내며 화자를 노출하는 작업은 19년 차 기자인 나에게 매우 매우 매우 부담되는 일이었다. 기자수첩 같은 칼럼이 아닌 이상, 기자는 초년병부터 기사를 쓸 때마다 필자를 지우고 객관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원칙을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으니까.


집요하고 다정한 속삭임


그럼에도 <씨리얼>이 10년에 걸쳐 버틴 시간 속에 확인한 것 중 하나는, 옳은 자세를 가지고 솔직하게 드러낸 시선에 대한 믿음이었다.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어떤 지향 혹은 통찰로 꿰어낸 정보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매력을 느끼기에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긴 씨리얼력(歷)의 팀원들은 원고 쓰기를 주저하며 두려워하는 나를, 선배고 자시고 내 알 바 아니라며 채찍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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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가장 중요한 시의성(이라고 쓰고 시류라고 읽는다)을 추구하면서도 힘을 숭배하지 않는 우리의 원칙을 지키려는 노력, 자극값 높은 정보를 나열하는 대신 묵묵하게 맥락을 엮으려 했던 고집. 동시에 ‘필사적으로’ MZ들에게 익숙한 표현과 감정, 나아가 정념을 버무려 내는 집념. 누군가 이런 <씨리얼>의 목표를 하나의 단어로 묶어내라 요구한다면, 나는 이걸 ‘다정함’이라고 부르고 싶다.


길을 걷다 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의 미모도 아니면서 처음부터 꾸미기를 포기하고, 상대가 우리의 슴슴하되 깊은 매력을 알아봐 줄 때까지 낮은 목소리로 계속 속삭였달까. 그래서 지금도 <씨리얼>은 화려한 무대 위 눈에 띄는 센터는 아니지만, 이 무대를 무대답게 만드는 실력 있는 퍼포먼서로 계속 호명되는 게 아닐까.


+방송작가 웹진에 납품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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