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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리 Nov 07. 2023

맞닿은 세상

과거와 현재



  처음 책을 접한 건, 아주 어렸을 때였다. 우리 집은 가난해서 책장과 책 같은 건 없었지만, 당시 같은 동네에 살았던 사촌동생네 집에 놀러 가면 시리즈별로 가득 꽂혀 있던 책장이 있었다. 사촌동생네는 우리 집과 달리 돈이 많았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책을 읽고 싶어지면 자연스럽게 동생네 가야지하며 룰루랄라 거의 매일 놀러 갔던 것 같다. 그때는 가난함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 구분하는 눈빛들에 대해.


 사촌동생들은 세명이고 친동생 한 명 그리고 나까지 총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 책을 읽는 어린이는 나뿐이었다. 안락한 의자에 앉아 그림과 글로 조합된 아이들용 책을 하루에 몇 권씩 읽어나갔다. 책 속에 빠지면 현실을 잊게 되고 내가 페이지를 넘기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호랑이가 많이 나왔고 가난하고 배고픈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책을 읽으며 내가 현실을 조금 도망치고 싶어 하는 아이라는 걸 그때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아무런 생각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유유히 걷던 내가 멈춰 선 것이다. 그때의 공기, 뛰어놀던 동생들의 우당탕 소리가 지금도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때의 내 안의 고요함 같은 것들, 아늑함 같은 것들도 함께.


 그립기도 했고 서럽기도 했던 것 같다.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해 보면 나를 따르던 동생들과 천진했던 내가 그리웠고 남의 집에 가 눈치 보며 읽던 그때의 내가 조금 처량해 서러웠다. 그렇다고 동생네가 부자라서 샘이 난적은 거의 없었다. 가난은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나를 따라다녔던 거였고 나에게 가장 무서운 건 돈이 아닌 변화였다. 하지만 그 변화는 대부분 돈 때문에 일어난다는 걸 지금은 안다.


 엄마와 아빠가 장사를 시작하게 된 것도 돈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여섯 살 때 이모의 터전이었던 곳으로 급하게 이사를 했다. 그전에는 가난해도 하루하루가 행복했고, 아빠 엄마 동생 그리고 키우던 큰 믹스견 뽀삐까지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눈으로 훑으며 스쳐가는 것들을 소중히 마중 나가 가득 담는 나날들이었다.


변화는 그렇게 순식간에 모든 걸 바꿔놓는다.


지금은 과거가 되었고 현실의 나는 다른 환경에서 지내고 있지만 그게 마치 내 옆에 숨 쉬고 있는 것처럼 생생할 때가 있다. 과거의 세상도 나에게는 지금의 세상과 함께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쌓여가면 쌓여갈수록 나는 기억할 게 점점 많아지고 점점 몇 가지를 잊어갈 것이다.


내가 현재 숨 쉬는 공기 중에는 그때 사촌네에 앉아 조용히 침묵하며 책장을 넘기는 어린 내가 내뿜는 숨도 함께 존재한다. 그럼 지금이 마치 과거처럼 나를 그때로 돌려놓는다. 지금과 과거의 세상을 잠깐 혼돈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세상이고 나의 현재인 것이다. 그걸 느끼게 된 건 꽤 지난 후지만, 퍽 살아가며 유일하게 위로가 되는 시간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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