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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강하 Sep 21. 2018

대피 권고가 내려진 오키나와에 여행을 왔다

태풍 '너구리'의 한 가운데에서


아침부터 세차게 내려치는 빗소리가 에어컨 소리보다 크게 울렸다. 아홉시쯤 일어난 우리는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공용거실로 나가보았다. TV에는 우비를 입고 비가 대각선으로 내려치는 거리를 서둘러 달려가고 있는 사람과 태풍의 이동 경로가 차례대로 비춰졌다. 태풍은 오키나와 하단, 우리가 머물고 있는 '나하'를 지나가고 있었다. 다른 게스트들 역시 태풍 소식에 스케줄이 취소되어 거실에 나와 뉴스 화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중 몇몇은 주먹밥이나 컵라면으로 요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허기를 자극했다. 


"우리 밥 먹어야 되는데."

"그러게."

"나가 볼까?"

"어디로?"

"어제 갔던 류보 백화점 가자. 하루 종일 여기 있을 수만은 없잖아."

"그래. 백화점은 열겠지? 한국은 태풍와도 웬만한 곳은 다 열잖아."

"맞아."


밖으로 나가려하자 직원은 우리에게 나가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가게들은 대부분 닫혀있을 거라면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나가보겠다며 우산을 하나씩 들고 나섰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문을 열고 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우산은 삼십초 만에 박살났다. 바람이 사방에서 종잡을 수 없이 불어왔다. 위로 뒤집혀 우산의 기능을 못하게 된 천을 비가 몰아치는 와중에 다시 안쪽으로 접어 겨우 머리만 가리고 차도 가까이로 달려 나갔다. 다행히 한산한 도로 끝에 택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세차게 팔을 휘저었다. 택시가 멈췄고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


"죄송합니다. 류보 백화점까지 가주실 수 있나요?"

"안 열었을 거 같은데.. 그래도 가보실래요?"

"아.. 그래요? 그래도 가주세요."


기사님의 백화점이 닫혀있을 거라는 말에 우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과연 문을 열었을 것인가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에 신호를 기다리느라 서있던 택시가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뒤집히지는 않겠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비를 뚫고 아슬아슬하게 도착해서 바라본 백화점 안은 온통 깜깜했다. 기사님이 '어떻게 할까요?' 하고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는 시무룩해져서는 '되돌아가주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탔던 곳에서 다시 내려 또다시 우산 천을 뒤집어쓰고 절실함을 안고 달렸다. 편의점은 제발 열었기를! 그 와중에 아무도 없는 길에 우비를 쓰고 삼각대에 카메라를 올려둔 사람이 있어 눈길이 갔다. 그 사람은 빗속을 달려가는 우리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분명 그날 저녁에 우리의 모습이 뉴스의 자료화면으로 나왔을 거다.





태풍때문에 대피권고가 내려진 오키나와에 여행하러 왔다 (이미지 출처 : 아주경제)





다행히도 편의점은 열려있었다. 홀딱 젖은 채 마구잡이로 먹을 것을 쓸어 담았다. 이렇게 폭우가 계속되면 언제까지 게스트하우스에 갇혀 있을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비를 찾았지만 품절상태였다. 우산통도 텅 비어있었다. 결국 너절한 우산 거적을 뒤집어쓰고 또다시 숙소를 향해 뛰었다. 나갈 때부터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다른 게스트들은 돌아온 우리 꼴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멋쩍게 웃으면서 다 망가진 우산을 쓰레기통에 밀어 넣었다.


폭우에 짧게나마 고생하고 씻고나와 먹는 오니기리는 정말 맛있었다. 후식으로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할 것이 없었다. 다른 게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그러던 중 카운터 좌석에 앉아있는 새로운 직원이 눈에 띄었다. 댄디컷에 심플한 옷차림. 그리고 패션의 완성인 얼굴까지 훈훈한 사람이었다. 난 이것을 알기 쉽게 한국 아이돌 스타일이라 부른다. 친구의 팔을 툭치며 속삭였다.


"저 사람 봐. 되게 한국사람 같다."

"어? 그러네?"

"훈훈하다."

"어. 잘생겼네."


우리는 힐끗거리며 그 사람을 몇 번 쳐다보았고, 그 눈길을 느낀 건지 그가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우린 들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이 아래쪽에 고정되어 있어도 그가 다가온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 왜 오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 분이시죠?"

"어?! 한국분이세요?"


우리는 동시에 얼굴이 환해지며 답했다. 고작 며칠뿐인데 한국 사람을 만난 게 정말 반가웠다. 뭐, 잘생긴 것도 한몫했겠지.


"근데.. 여기서 일하시는 거예요?"

"네. 방학 동안에만 일하고 있어요."

"그러시구나. 저희 방금 되게 한국사람 같다고 말하고 있었어요. 하하."


그는 우리에게 어디를 여행할 예정이었는지, 여행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우리는 마치 선배나 가족을 만난 것처럼 하소연하며 줄줄 우리의 사정을 털어 놓았다. 그는 태풍이 내일은 지나갈 것이라며 요론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우리를 토닥였다. 나는 마음까지 훈훈한 사람이라며 속으로 감탄했다.


다른 직원이 부르는 소리에 길게 이야기를 못하고 또 둘만 남겨졌다. 결국 심심함을 못 참은 우리는 다른 게스트들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처음 말상대는 바로 옆에 앉은 캐나다에서 온 남자였다. 그는 휴가를 받을 때마다 오키나와에서 한 달을 보낸다고 했다. 캐나다의 휴가는 한 달에서 한 달반 정도라고 한다. 취미로 가라테를 배워서 일본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는 그에게 나는 어깨를 부딪히는 인사를 해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가 흑인이었기 때문에 내 로망이었던 쿨한 인사법을 요청한 것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인종차별적으로 보이진 않았을지 걱정이다. 난 그에게 우리가 밖에서 정말 힘들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며 농담이랍시고 'we almost die'라고 말했고, 그는 진지하게 놀라며 걱정해주었다. 나의 영어의 한계였다. 그 외에도 스웨덴이나 일본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외국어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에너지 소모가 필요한 일이었다. 결국 금방 지쳐서 낮잠을 잤다.


윤만세의 그림 insta@yoon10003





다음날은 비가 그쳤다. 어제 본 한국인 직원은 유이레일이 오늘부터 운행을 한다고하니 배나 비행기는 못 타더라도 오키나와 안에서의 관광은 가능할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감사하다고 대답한 후 염치없지만 내일은 요론으로 가는 배가 뜰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알겠다며 오늘은 오키나와 관광을 다녀오라고 말해주었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밖에 나섰다. 무섭게 쏟아졌던 폭우가 꿈이었던 것처럼 비는 그쳤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기분 좋은 날씨였다. 


유이레일을 타고 번화가인 겐초마에역에서 내렸다. 백화점 앞 가로수가 꺾여 도보 위에 누워있었다. 이런 상황에 나오려고 했으니 다들 말릴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과 일본은 가깝지만 태풍의 위력에 있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는 걸 제대로 알게 되었다.


메인거리를 벗어나 아기자기한 가게들도 구경하고, 영화관, 준쿠도 서점, 슈리성까지 갔으나 우리는 시큰둥할 뿐이었다. 머릿속에 요론섬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슈리성에서 도장을 찍으면서도 '여기서 지금 이거나 찍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는 생각만 들었다. 속 타는 마음으로 회전초밥 집에서 맥주를 한잔하고 숙소로 들어왔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 직원이 '비행기는 갈 수 있대요!'라며 기쁘게 우리를 반겨주었다. '예약해드릴까요?' 라는 물음에 '네!!' 우렁차게 대답했다. 우리는 뛸 듯이 기뻐하며 배보다 세 배나 비싼 비행기 값도 아랑곳 않고 바로 예매를 했다. 아마 그 한국인 직원이 없었다면 요론에도 못가고 되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마운 분이다. 








그나마 좋았던 오키나와 본섬의 추천 장소


1. 준쿠도 서점

https://honto.jp/store/detail_1570050_14HB320.html&extSiteId=junkudo

각종 문구류와 팬시 용품, 일본의 서적들을 구입할 수 있다.


2. 사쿠라자카 극장

http://sakura-zaka.com/

손수만든 디자인 제품과 카페, 극장이 함께 있는 복합 문화공간


3. 제일 마키시 공설 시장

https://kosetsu-ichiba.com/

국제거리를 걷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시장거리. 먹을거리, 의류, 악기 등등 다양한 구경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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