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이 가져온 개신교의 자기모순적인 무한 증식과 분열
종교개혁은 중세 말 가톨릭 교회의 부패, 곧 면죄부 판매, 성직 매매, 교황권의 세속 정치 개입에 대한 도덕적 항거로 시작되었다. 루터의 95개 조항(1517)은 교회의 영적 타락을 폭로하는 ‘양심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 양심적 행동이 기독교의 신학적 단일성을 파괴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교황청의 권위가 약화되는 순간, 신학적 판단의 ‘최종 심급’이 사라졌고, 바로 그 '틈새시장'에서 각 지역의 정치 세력과 사회적 이해관계가 신학을 ‘정치화’하고 ‘국가화’하는 길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은 종교개혁이 단순한 ‘신학적 정화 운동’이 아니라, 유럽의 권력 지형을 급격히 재편한 정치혁명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개혁자들의 사상은, 그들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각 지역 영주, 도시 귀족, 평민, 길드, 시장,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재배치되었고, 그 결과 개신교 내부는 빠른 속도로 여러 갈래의 전통으로 분열하였다.
특히 루터, 츠빙글리, 칼뱅, 뮌처라는 네 인물은 각각의 신학적 선명성만큼이나, 정치적 선택, 경제적 후원자, 계층적 기반이 서로 달랐다. 이 차이가 개혁 신학의 다양성을 심화시켰고, 더 나아가 교단의 구조적 분열, 심지어 무력 충돌까지 가져왔다.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며 출발했지만, 개혁자들 스스로가 정치권력과 손잡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의 권력투쟁과 교권의 타락이 진행된 것이었다.
분열의 토양은 이미 중세 말부터 유럽 전역에 마련되어 있었다. 로마 주교인 교황의 세력은 약화되고 지역의 정치 세력은 강화되었다. 사실 14세기 이후부터 교황권은 이미 내부적으로 약화하고 있었다. 아비뇽 유수(1309~1377), 교황권 분열이 촉발한 서방 교회의 대분열이 1378년부터 1417년까지 진행되었다. 면죄부 판매는 교황청의 재정 위기를 막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권이 세속의 왕권에 대해 더 이상 정치적 개입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결론을 향했다. 곧 로마 교황청은 더 이상 절대적 권위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황청의 약화는 각 지역의 정치 세력에 신학적 실험과 교회 독립을 시도할 여지를 열어주었다. 특히 북부 독일의 제후들에게 종교개혁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교황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하기 위한 좋은 구실이 되었다.
경제구조의 변화도 큰 역할을 했다. 중세 말부터 근세 초까지 유럽에서 도시가 급성장하였다. 신흥 부르주아가 정치 경제적 중심 세력이 된 도시는 귀족이 지배하는 농촌과 달리 교황청의 금전 요구에 대해 거부감이 컸고, 특히 길드는 개신교가 내세우는 도덕적 엄격성, 시민 윤리, 성경 중심주의에 공감했다. 츠빙글리와 칼뱅의 개혁은 바로 이러한 도시의 ‘시민적 경건성’을 든든한 지지 기반으로 삼은 것이었다.
반면 농촌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농민들은 지주와 세속 영주만이 아니라 교회의 ‘이중 착취’에 지쳐 있었다. 이들은 종교개혁을 사회적 해방의 복음으로 해석했고, 바로 그 기대를 선명하게 표현한 인물이 바로 토마스 뮌처였다. 이처럼 개혁운동의 ‘사회적 기반’이 서로 달랐기에 개신교 내부의 분열은 처음부터 필연적인 것이었다.
종교개혁가들의 기반이 서로 달랐다. 루터는 제후의 지원을 받았고, 츠빙글리는 도시 귀족과 상공인, 칼뱅은 상공인만이 아니라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뮌처는 농민과 무산자 계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정치적 동맹의 차이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신학 구조를 낳게 되었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Justificatio sola fide)는 신학적 핵심을 통해 사제 중심의 성례주의적 가톨릭 신학을 흔들었다. 그러나 실제 유럽의 16세기는 여전히 영주와 귀족 체제의 지역적 권력이 지배하던 시기였고, 종교개혁이 확산되기 위해서는 이들과의 정치적 협력은 필수적이었다. 루터는 이러한 구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비텐베르크 지역 영주인 프리드리히 현명공의 보호가 없었다면 그의 종교개혁은 시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바로 여기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미 기득권층의 정치적 후원에 의존하는 보수적 개혁이라는 근본적 한계를 내포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교황 대신 지역 영주에게 종교 행정 권한이 넘어가는 이른바 ‘영주교회주의’(Landeskirchentum)로 재편되었다. 이는 교회가 성경과 양심에 의해 세워지는 새로운 공동체가 아니라, 단지 가톨릭 교회 정치 구조가 다른 주체에게로 옮겨간 것에 불과한 셈이었다. 구시대적인 성직자와 신자 사이의 주종 관계라는 패러다임의 여전히 남게 된 것이다.
루터는 ‘성경만이 신앙의 유일한 기준’(Sola Scriptura)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는 곧바로 성경 해석의 무한 경쟁을 초래했다. 성경을 교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 맘대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까지 가톨릭은 라틴어 성경의 독점을 통해 교리를 통제했으나, 각 나라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사용한 개신교는 모든 신자가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기에 해석의 권위가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루터의 만인사제설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 결과 루터파와 츠빙글리 파는 성찬례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루터파와. 칼뱅 파는 그리스도의 존재 방식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재세례파와 나머지 모든 개혁파는 세례, 국가, 교회의 의미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이에 지지 않고 영국의 성공회와 대륙의 개혁파, 그리고. 청교도파도 서로 대립하였다. 이것도 모자라는지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형제단, 회중교회도 서로 대립하였다. 이리하여 오늘날 전 세계 개신교 교단 수는 정확한 통계를 내기 어려울 정도로 난립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4~5만 개의 교화가 있는 것으로 추산될 뿐이다. 예수 한 사람에서 출발한 하나의 종교인 기독교가 이제 5만 개에 육박하는 웃지 못할 현상이 벌어진 것은 오래된 이야기다. 가톨릭의 부패와 독재에 맞서 시작한 종교개혁의 결과 등장한 개신교가 내부적으로 서로를 향해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이단이다”, “참 교회는 우리뿐이다”라는 정죄하는 일이 되풀이되어 왔다. 종교개혁의 이념이었던 자유와 양심은 신학적 경쟁과 분열의 ‘시기’로 변질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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