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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ul 01. 2020

장바구니 든 여인

혹여나 쳐진 표정으로도 장을 보진 말아야지

짧았던 자취 시절부터 온라인 장보기를 즐겨 이용하는 나는 부러 장을 보러 가는 일이 별로 없다. 굳이 나간다면 배달이 안 되는 주류, 눈과 코로 확인한 뒤 사고 싶은 과일이 있을 때, 배달받기에 무안할 정도로 아주 소량의 물품이 필요할 때나 장을 보러 나간다.


이 장 역시 시장은 아니다. 시장이 없는 지역에 살기도 하고 요즘에는 ‘시장답게’ 생긴 시장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결혼 전 친정집 근처에서 다닌 시장은 늘 바닥에 물기가 고여 있었다. 어류를 파는 쪽이나 식당이 있는 구역, 음료나 간식을 파는 매대 주위엔 항상 소량이나마 물기가 고여 있었다. 그래서 머릿속에 시장을 떠올리면 그 물기가, 그리고 손에 쥐고 다녀도 어색하지 않은 군것질거리가 머리맡에 따라온다.


이제는 부러 차를 타고 나가지 않는 한 찾기 어려운 시장에 가지도 않고, 그저 천천히 걸어 나가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동네 마트에 간다. 더 이상 시장에 가지 않는다 해서 아쉬움이 남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시장 앞에 붙는 ‘재래’라는 말에 정나미가 떨어져서인지 말끔하게 상품을 정리한 마트만 가게 된다. 이렇듯 결혼한 지 몇 해 만에 장보는 장소나 방식에 나름이 취향과 노하우가 생겼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문득 장바구니 든 내 모습이 궁금해졌다. 몇 년 사이에 나를 둘러싼 많은 것이 바뀌었고, 나 역시 많이 변했다. 오래전 좋아하던 것에 심드렁해졌고, 새로 알게 된 것에 골몰하고, 무언가를 즐기는 주기가 들쭉날쭉 변해버린 내가 장을 보고 나올 때의 모습이란.


집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마트가 있다. 그곳에서 갖가지 장을 보고 나오며 깨달은 점이 있다. 나는 마트를 비롯해 동네를 다닐 때면 어딘가에 구속받지 않는 차림새로 넓고 긴치마를 입는다는 것. 마트에 갈 땐 사야 할 품목을 핸드폰 메모장에 분명 적어놓지만 언제나 그것보다 훨씬 많은 물건을 담아온다는 것. 그렇게 예상치 못한 욕심이 매번 일어나는 바람에 장바구니는 말도 못 하게 불룩하다는 것.


오늘은 장보기를 마치고 마트 옆에 끼어있다시피 위치한 작은 카페 유리에 얼른 내 모습을 살펴본다. 여전히 긴치마를 입고 불룩하게 살 찌운 장바구니를 든 내 모습. 접어놓으면 작은 주머니처럼 몽당해지는 장바구니가 이때만큼은 근육질 가방으로 변신해 한 손에 들려있다.


다시 길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있으니 햇볕이 쨍해 정수리가 뜨겁다. 더워지더라도 장바구니를 들고 씩씩거리진 말자고 혼자 다짐했다. 그건 너무 억세고 우악스러워 보일 수 있으니까. 혹여나 쳐진 표정으로도 장을 보진 말아야지, 아래쪽 매대에 있는 물건을 꺼낼 일도 있으니 역시 긴치마는 좋지 않겠어, 산뜻한 식탁보처럼 밝은 옷을 입고 장을 봐야겠어, 하고 작은 다짐들을 추리며 나를 기다리는 집으로 걸음을 보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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