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12 똥 앞에 장사 없다.
가진 게 나 밖에 없어서요.
#1.
오늘의 주제는 똥이다. 그러니 비위가 약하거나 식사를 앞둔 사람에게 이 글을 추천하지 않는다.
예전에 숙취와 관련된 글을 쓴 적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과음을 해서 숙취에 시달리는 동안은 우울증이고 나발이고 간에 빨리 속이 괜찮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삶과 생존에 대한 의지가 사실 얼마나 강한지를 새삼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런 순간을 잘 보내고 나면 그 순간이 찾아온게 내심 운이 좋은 것 처럼 느껴지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 그 행운의 순간을 다시 겪을 수 있었다.
#2.
본가에 내려와있다. 이것도 저것도 분명하지 않은, 앞날이 어두컴컴한 상황에서 함께 사는 애인이 집을 나서버리면 혼자 방황하며 긴 하루를 버티는게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는 입장에서 썩 좋지 못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내려오면 다른건 못해줘도 밥은 줄 수 있다는 엄마의 말에 홀려 본가로 내려왔다.
내려와서는 꽤나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8월 즈음 통장에 꽂힌 근로장려금으로 전화 영어를 끊었다. 일어나면 전화 영어를 하고 진수와 산책을 한 뒤 다시 운동을 한다. 그리고 모래알로 집을 짓는 심정으로 토익공부를 한다. 틈틈이 구인구직 공고를 확인하고 이력서와 자소서를 써서 낸다. 이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앞으로 갈길이 구만리라 막막하기도 하면서도, '뭐든 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낙관주의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보통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과 당최 무슨 일을 해야할지 모르겠음으로 야기되는 불안감과, 이제껏 해온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는지에 대한 후회나 회한 같은 것들로 머리속이 가득하다.
#3.
문제는 오늘 아침 잘못된 판단에서 시작되었다. 아침에 뱃속 사정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중간점검 없이 그냥 산책을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근처 공원을 도는 코스의 중간 쯤 되었을 때 야속하게도 신호가 왔다.
순간 거짓말 처럼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고 오직 한가지 생각만을 하게 되었다. 간절하게 바라게 되는 한가지 생각.
지겹게 나를 괴롭히던 과거에 했던 실수들, 얄궂은 인연들, 미래에 대한 불안함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뒤로 치워지고 단 한가지 생각만을 간절하게 하게 되는 그 순간에 식은땀과 함께 웃음이 났다. 배가 남아 있는 저장공간이 없음을 꾸준히 그리고 시급하게 알릴 때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과 함께 웃음이 계속 났다. 사회에 속해 있지 못한 것 같아 괴로웠었는데. 마지막 남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참아보려는 모습이 누구보다 사회의 구성원 같아보였다. 아 나는 아직 똥 참는 문명인이구나.
다행히도 불상사는 없었다. 만약 지렸다면 오늘 이 글을 쓰고 있지는 않겠지. 다만 예전 숙취로 고생할 때 내가 얼마나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지를 불가항력적으로 알게 되었었던 것 처럼 오늘도 내가 얼마나 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인지를 다시금 느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다 포기해버리지 않았구나 현석아. 그래도 아직 너는 똥 참는 문명인이구나.
오늘 냈던 안간힘으로 다시 또 몇일 살아봐야겠다. 그럼 또 이런 행운의 순간이 찾아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