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 네오 감독 해피엔드 줄거리 및 리뷰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모습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로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소라 네오 감독.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들이라는 점과 <오퍼스> 작품에서 보여 준 영상으로 큰 기대를 모으는 감독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첫 극영화가 개봉했다. 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영화이자, 바로 오늘 정식 개봉을 하게 된 영화 <해피엔드>가 그 작품이다.
전체주의의 섬뜩함을 품은 영화
작품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주인공 유타와 코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음악연구회라 불리는 동아리 활동을 하는 이들은 학교 수업보다 음악을 사랑하고 즐기는 아이들이다.
하지만 곳곳에서 만연한 차별을 느낄 수 있다. 먼저 코우는 ‘박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재일조선인 4세로 일본인의 피가 아닌 조선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만으로 불합리한 대우를 받기 일쑤다.
본토 일본인 혈통이 아니라면 이들은 불시 검문을 받을 때 외국인등록증과 같은 서류 제출을 강요받는다. 법적으로 휴대 의무가 없다 해도 거의 강제에 가깝게 경찰은 이들을 몰아세운다. 말이 경찰이지 제국주의 시절 순사가 하던 짓과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눈엣가시였던 교장을 골탕 먹이기 위해 차를 수직으로 세워두는 장난을 친 사건 이후,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파놉티’라 불리는 감시 시스템이 설치된다. 벌점 부과시스템을 만들어 벌점을 받는 장면을 교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으로 모두에게 공개하기도 한다.
또한 일본의 대외적 위기와 맞물려 자위대 대원의 정신교육 시간이 생기는데 이 수업에서 본토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 혹은 혼혈 일본인은 제외된다. 토종 일본인만이 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이 정치인들 사이에 있던 것이다. 이를 문제라 생각하고 데모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최루탄을 터뜨려가며 강경 진압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절대다수를 위해 소수의 행복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를 보여준다.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어도 상관없으며, 모든 사람들의 정보를 데이터화하고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이를 조회한다.
또한 정신적인 무장을 강조하고, 자신의 인종만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우생학적 기조도 영화 전반에 걸쳐 깔려 있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건 제국주의 시대의 독일, 혹은 일본의 모습이다.
‘파놉티콘’의 이름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파놉티’라는 감시 시스템, 그리고 이를 보여주는 거대 스크린으로 부정적 여론을 통제하는데, 이는 조지 오웰의 <1984>에서 텔레스크린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유사하다. 물론 감독이 이 체제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되는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배경을 깔아 두는 것뿐이다.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고 음악만 좇던 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구시대의 인물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졸한 일들을 벌이는지, 그리고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젊은 사람들의 분투가 어떤 지를 아주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의 반역, 혹은 혁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들이 변화했고 성장했다는 것이 가장 큰 요소였으니 말이다. 작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모함이지만 그런 무모함과 용기가 한데 엉켜 세상은 좀 더 올바른 쪽으로 구르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가 어른이 되었는가?
작중 유타는 디제잉과 음악에 아주 푹 빠져 사는 학생으로 묘사된다. 학교 공부도, 사회 문제도 중요하지 않다.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마약인 음악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 유타를 보며 코우는 어른이 되지 못했음을 비난한다. 유치원 시절부터 알고 지냈기에 친구로 지낸다만, 대학생 이후에 만났더라면 친구가 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다른 친구에게 털어놓는다. 자신이 차별을 받는 대상이어서 일수도 있지만 코우는 사회 문제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품는 의문도 꽤나 합당했다.
하지만 진짜 어른은 유타였다. 언뜻 코우가 데모에 선봉에 서는 주체적 인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코우는 잘 알지도 못한 채 데모에 참여한다. 같은 학급 친구인 후미에게 호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재일조선인인 코우는 자신이 느낀 차별과 아픔을 토해내기 위해 참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수동적으로 이끌림 당할 뿐이었다. 직접 발을 구르는 페달이 아니라, 체인에 연결된 톱니바퀴 중 하나가 되어 바퀴를 굴려갈 뿐이었던 것이다.
디제잉에만 푹 빠져 있던 유타는 결정적 순간에 그를 돕는다. 교장의 차로 장난을 친 것이 본인이라고 자수하며 말이다. 물론 주실행범이 본인이었던 만큼 그의 고백은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방관자였던, 혹은 공범이라고도 볼 수 있던 다른 음악연구회 친구들을 위해 입을 다문다. 그리고 자신이 퇴학을 당하더라도 차별을 받았던 친구들을 위해 진실을 말한다. 더 정확히는 코우를 위해서.
그는 코우와의 관계가 예전 같길 바랐다.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 수 있는 죽마고우. 어지러운 세상에서 눈을 돌리고 숨을 내쉴 수 있는 자유 같은 관계를.
하지만 코우는 변하고 있었고 변하고 싶었다. 발단은 데모 가담이었을지 몰라도 그는 늘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편이었다. 경찰에 잡히기 전 도망을 치려던 모습도, 벌점이 부과되기 시작하자 몸을 사리던 모습도, 교장실을 점거하길 거부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리던 모습도.
여전히 철부지임은 분명하나 사회 시스템의 일원이라는 인식은 놓지 않았다. 그의 발은 꿈을 딛고 서있을지 몰라도 그의 머리는 현실을 기웃거렸다. 꿈과 음악만으론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는 본인의 실리를 챙기기 위해 움직였다. 유타와의 관계에서까지 말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자리를 꼿꼿이 지키던,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도 손을 내밀던 유타의 우정이야말로 더 진한 농도의 감정이었다. 감독이 말한 멜로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마도 유타의 감정을 말하는 듯 보였다.
어째서 제목이 해피엔드인가?
유타는 졸업을 코앞에 두고 퇴학을 당한다. 퇴학을 당한 현실을 어째서 해피엔드라 부를 수 있는 걸까? 그것은 유타가 행한 주체성에 있다.
교장이 멋대로 떠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라는 말처럼 행복하기 위해서는 주체성이 필요하다. 누군가에 의해 쥐어짐 당한 행복은 결코 충분한 행복이라 할 수 없다. 감시를 폐지하자는 의견을 거부하는 아이들처럼 편하게 주어지는 시스템에 순응한다면 이들이 쟁취하는 성공의 크기도 작아지는 것이다.
유타는 분명 실패자다. 제대로 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친구와의 관계도 예전보다 껄쩍지근하다. 음반 가게 아르바이트 일 말고는 제대로 하는 것도 없고, 이렇다 할 꿈도 없다.
그럼에도 유타에게 주어진 미래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이다. 확실하지만 뜨뜻미지근한 온도의 행복을 쥐는 걸 거부하고, 얼마나 차가울지, 혹은 얼마나 뜨거울지 모르는 미지의 감정을 쥐는 걸 택한다. 당장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바보 같은 짓이지만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가기로 결심한다.
이 선택을 유타는 오랫동안 후회할 수도 있다. 반대로 오랫동안 잘한 결정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쪽의 결론이 나든 그에게 남겨진 미련은 없다. 그것 하나만으로 그에게는 행복한 결말인 것이다. 하나 더하자면 그렇게 아끼던 친구인 코우에게, 보다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주는데 일조했다는 만족감 하나만으로 그는 이 엔딩을 해피엔딩이라 말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사카모토 류이치' 라는 거대한 그림자를 넘어
지난 주말, 영화의 정식 개봉 전 프리미어 상영으로 먼저 관람을 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영화로 알고 있는데 이에 부응하듯 좌석은 만석으로 가득 차 영화의 흥행을 암시하는 듯했다. 감독과 주연 배우의 무대인사도 있었는데 그들의 이야기처럼 오랜 친구가 떠오르고, 괜스레 웃음이 지어지는 영화였다. 적극적인 팬서비스와 놀라운 한국어 실력을 뽐낸 탓에 팬이 아니었던 관객도 팬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물론 영화 자체의 아쉬운 점은 꽤 눈에 띈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좋은 음악과는 달리, 너무나 노골적인 메시지와 일차원적인 전달방식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지나치게 다양한 주제를 담고자 했던 것도 약간의 미스다.
'어른이 되기 전 달라지는 친구와의 관계'가 메인 주제지만 그 속에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 갈등, 인종차별, 프라이버시 침해 등 너무나 많은 코드가 산적해 있다. 물론 이런 주제를 한꺼번에 다루는 건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이 주제가 모두 수면 위에 둥둥 떠다닌다. 덕분에 어느 것에 집중해야 할지 판단을 흐리게 하고 다소 산만한 분위기로 결말로 향한다.
단순함만이 최고의 정답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많은 주제는 사족에 가깝다. 더구나 그 주제 하나하나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가 않아 조금 더 포커스를 맞추고 분량을 할애했다면 더 재밌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첫 극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작품 퀄리티라 생각한다면 충분히 뛰어났고, 배우들의 연기, 영상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운 장면들은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아도 될 작품이라 생각했다. 촬영과 영상미 부분은 이미 상당 수준 이상으로 올라와있음을 증명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소라 네오 감독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2년 전 작고한 사카모토 류이치의 유명세가 엄청났기 때문에 그를 소개할 때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레 붙는다. 이는 그가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혹은 자신을 갉아먹는 병이 될 수도 있다. 아버지의 명성이 있는 만큼 그에게 호감을 갖는 이도 적지 않으나 그만큼 높은 기대치를 증명해야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첫 시작은 훌륭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명성을 쫓아가려고만 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지만 자신이 구축한 독특한 예술 세계를 발전시키고 보여준다면 그를 수식하는 단어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들'이 아닌 영화사적 평가가 덧붙인 별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