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엘리오 줄거리 및 리뷰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집단 픽사. 그들의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주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어렸을 적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 어른들에 가슴에도 깊숙이 스며든다. 아니, 오히려 어른들이야말로 픽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최적화된 주타깃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픽사의 신작 <엘리오>가 개봉했다. 더없이 아름다운 작화와 섬세한 감정선을 다룬 이야기를 통해 그들은 또 한 번 마법 같은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다소 진부한 이야기라는 평도, 밋밋한 사건을 따라가는 평이한 스토리라는 평도 심심치 않게 보이긴 하나 이 영화를 재밌게 본 사람으로서 영화가 가진 매력과 소구 포인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상실을 통해 우리는 한 뼘 더 성장한다
주인공 엘리오는 부모님을 잃는다. 사인에 대해서 정확히 언급되지는 않으나 동시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모가 그를 키우게 되었다는 걸 봤을 때 불운한 사고에 휘말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란 존재는 커다란 우주와 다를 것이 없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소속되는 집단이자 울타리로써 하나의 영역을 형성하는 가족이라는 존재. 그중에서도 부모는 단순히 아이의 양육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행동하는 것을 넘어 아이의 사고와 정서발달, 행동과 말투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런 부모가 사라졌을 때 아이는 큰 혼란과 마주한다. 고모가 맡아줌으로써 최악의 상황을 면한 것은 맞지만 부모의 존재가 어찌 그리 쉽게 채워질 수 있을까? 다소 삐딱하게 행동하는 엘리오의 행동이 밉게만 보이지 않았던 건 이면에 깔린 우울함과 상실감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위로를 받게 되는 건 뜻밖에도 '우주'다. 출입이 통제된 플라네타륨 방에서 우주의 모습과 이야기를 들은 엘리오는 우주에 감화된다. 생물이 존재하는 5억 개의 행성 중 자신을 받아들여줄 누군가가 존재할 가능성을 믿게 됨으로써 말이다.
이 부분은 역설적으로 가장 슬픈 장면이다. 80억 인구가 사는 지구에 엘리오가 맘 편히 대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단 한 명도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이의 우주였다는 이야기를 반추해 볼 때 그는 우주를 잃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작은 운석 조각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이야기는 진공 상태라는 특수성 때문에 매질을 타고 전해질 수 없으며, 끝도 모를 암흑 속에서 침전하는 것 외에 그 어떤 빛의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가 우주인에게 납치당하고 싶던 건 그 이유다. 온 지구가 부정해 온 자신의 존재를 편견 없이, 차별 없이 받아들여줄 누군가를 만나고자 했기 때문에. 조금의 희망도 찾지 못한 현실을 벗어나 그래도 살아가야 함을 이야기하며 토닥여줄 동료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기댈 곳 없는 아이는 빨리 철이 든다.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현실을 바라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에 그들은 상상력을 내려놓고 현실의 눈을 뜨게 된다. 엘리오는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있지만 동시에 처세를 위해 현실적 판단을 빠르게 해야 했다. 매사에 밝고 도전정신으로 번뜩이는 탓에 그의 이야기가 용감한 모험 정도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갈 곳 없는 소년이 자신의 행성을 떠나 타행성에 어떻게든 뿌리내리려고 분투하는 장면은 대견한 웃음이 나오기보다 안쓰러운 눈물이 글썽여지는 장면들이었다.
그렇게 엘리오는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갔다.
진짜 친구란 무엇일까?
이야기는 이종(異種) 간의 우정을 그린다. 지구 대표로 소환된 행성에서 커뮤니버스를 위협하는 그라이곤과 협상하기 위해 그의 기지로 뛰어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거당할 위험을 모면하고 그라이곤의 아들은 글로든과 조우한다.
벌레(?)처럼 생긴 글로든의 첫인상은 괴이했지만 이내 둘은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 이들은 서로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진짜 친구가 무엇인지,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들의 우정은 희생과 배려를 바탕으로 바로 세워진다. 그라이곤의 위협을 피해 다시 커뮤니버스로 귀환하고 싶은 엘리오를 위해 글로든은 가짜 인질이 되어준다. 그렇게 빠져나간 커뮤니버스에서 추워하는 글로든을 위해 엘리오는 따뜻한 센서를 활성화시켜준다.
어디 그뿐인가. 전투병기가 되기 싫었던 글로든을 위해 엘리오는 복제품을 만들어 갑옷에 넣으려 했고, 불의의 조작으로 지구로 송환된 글로든을 지키기 위해 엘리오는 자신의 외투를 덮어준다.
어린아이들의 우정인만큼 하잘 것 없는 소꿉장난처럼 보여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행동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위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친구, 우정. 너무 자주 쓰이는 단어라, 너무 오랜 기간 알고 있던 말이라 개념에 대해 잊고 지내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 어른들에게 두 생명체는 진정한 의미를 상기시켜준다. 함께 있으면 즐겁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이. 상대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을 줄 알고,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 평소 하지 않던 행동으로 응원하는 사이. 이것이 우정이고 친구라는 단어임을.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엉겁에서도
다시 이야기를 앞으로 조금 감아보겠다. 홀로 버려진 엘리오는 그 누구에게도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친구라는 관계는 사치고, 고모의 친절 역시 부담스럽다. 어떤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관계는 그에게 욕심이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희망을 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첫 번째는 죽음, 두 번째는 회피. 다행히 첫 번째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어린아이였던 엘리오는 나름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첫 번째 안을 택하기엔 그는 너무 어렸고, 그렇게 피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 안인 회피를 택한다. 지구라는 행성에만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에 속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흐르지만 이것은 어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홀로 캄캄한 우주에 버려졌다고 생각한다면 어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우울증과 같은 정신 질환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 역시 이러한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초연결사회가 되며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와 쉽게 연결될 수 있다. 인스턴트 메시지는 더 이상 비싼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며 메시지 교환은 약간의 딜레이도 용납하지 않고 빠르게 상대에게 전달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거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물리적인 질감을 공유하지 못하고 시각화된 정보를 배제당한 채 떠들어댄다면 이들은 반쪽짜리 소통에 불과한 활동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대화할 때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비언어적 표현으로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주고받는다. 얼기설기 연결된 수많은 가짜 관계가 아닌 굵은 밧줄처럼 연결된 몇 개의 진짜 관계가 한 사람을 지탱해 주는 데 훨씬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칠흑 같은 현실을 살아가며 자신이 발 디딜 행성을, 그리고 나에게만큼은 반짝이는 별을 찾아 헤맨다. 운이 좋아 쉽게 그런 사람과 마주하는 경우도 있으나 오랜 시간이 걸려도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후자의 사람들도 약간의 희망으로 반짝이는 별을 좇는다. 자신의 어둠을 부끄러워하고 주저할 수도 있지만 물리적인 연결됨이 인류의 오랜 습성이자 진화한 결과물인 만큼, 이들은 막연함과 두려움을 무릅쓴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속성이자, 인류를 지탱해 온 근원인 탓이다.
5억 × 80억 × ∞
우리는 우주라는 광대한 개념에서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지구에서 대한민국이란 땅에서, 2025년을, 각각 위치한 자리를 살아내고 있다. 영화에서 설명하는 5억 개의 행성, 80억 명의 지구, 여기에 인간으로 태어났을 가능성을 곱하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숫자가 나온다.
즉 내가 만나고 경험한 모든 사람과 사건들이 불가능에 가까운 가능성을 뚫고 연결된 것이라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마주한 많은 사람들과 우리는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하물며 가까운 관계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멀어지기도 하니 숫자가 주는 광막함이 오히려 현실감을 상실케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기적에 가까운 순간이 우리 일상과 지천에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너무나 소중한 사람과의 만남, 기대했던 사건의 발생, 혹은 노력으로 이뤄낸 어떤 성과 등 우리는 기적이라는 벽돌 위에 또 다른 기적을 얹어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만들어간다.
간혹 이 익숙함이란 타성에 젖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고 스스로를 옭아매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 역시 연결된 상대방과 나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긍정의 말만 남은 세계에 천국은 없는 것처럼 부정적인 감정이야 말로 긍정의 반짝임을 선명히 볼 수 있는 기회이니 말이다.
빛을 잘 보기 위해서는 밝은 곳에 서있기보다 어두운 곳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어둡게 함으로써 잊고 있던 소중한 존재들의 가치를 깨닫는다. 우리가 살아내는 오늘은 기적과 기적의 덧셈과 곱셈으로 엮여 있다. 비록 모진 풍파와 감정의 파고 속에서 휘청거릴지어도 전복되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야 함은 이 속성에서 기인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칼 세이건이 우주를 연구하며 써낸 <코스모스>에서 우주를 향해 남긴 헌사이자, 자신의 아내를 위해 써낸 문장으로 마무리지으려 한다. 우주의 시간에서 찰나도 되지 못하는 인간의 짧은 수명에서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기보다 사랑으로 충만한 진짜 가치를 좇게 되길 바란다.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엉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당신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