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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작가 박신 May 28. 2024

[농사인문학] 농사의 시작은 제초.

글쓰기를 좋아하는 도시여자가 시골에 적응해가며 끄적이는 농사에세이 2

모든 농사의 시작은 제초이다. 

철에 아주 부지런히 뿌리를 내린 논두렁의 잡초들을 제대로 죽여놔야 

논에 벼들이 자랄 때 잡초의 방해를 받지 않는다. 


새 시작을 무엇인가의 죽음으로 시작한다는 것. 

이것은 너무 자명한 자연의 섭리라서 

어떤 글을 덧붙여도 잡다구리한 이야기만 될 것 같다. 


나는 잡초제거를 하며 가끔은 잡초를 위해 묵념을 하기도 하는데,

잡초로 태어나 비록 생을 다하지 못하고 약에 죽어가게 해서 미안하지만,

빨리 죽는 만큼 다음 봄엔 더 빨리 피어나서 원없이 살다 가기를 기도해준다.


[네가 잡초라해서 쓸모없는 인생이라 여기진 않는다.

나 역시도 잡초라서 아무도 몰라주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지만

나는 내 생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으니

잡초 너의 인생도 그리 했으리라. 

하지만 벼로 태어나길 권하지도 않겠다. 

처음부터 너무 기대를 받는 삶, 귀히 대접받으며 주는 물 받아먹으며 

계획대로 자라나, 계획대로 심겨져, 계획대로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니.

우린 그렇지 않았잖아. 

땅 속을 제 힘으로 비집고 나와 부족한 해와 부족한 비로 여기까지 살아내었으니 

다음엔 좀 더 일찍허니 솟아나와 

겨울이 떠나가는 것도 보고, 봄이 다가오는 것도 느끼어 보자.

이제 갈 시간이다.]


뭐 이런 방식의 묵념이다.


쓸데없는 잡초에게 너무 많은 자아를 투영했나 싶으면서도 

봄을 만끽하고 떠나가는 잡초가 부럽다.

논에 벼가 자라는 시간은 길어야 5개월이고

나머지 7개월 동안 논두렁과 들판은 모두 잡초의 시간이다. 

땅의 시간으로 보면 논의 진정한 주인은 잡초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잡초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벼농사.

다시한번 말하지만

죽음으로 새 시작을 하는 것은 너무 뻔한 세계의 섭리니까.

잡초를 너무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장하다 여겨주며 잘 보내주면 될 따름이다. 


(때로 질긴 잡초들은 벼들 사이에서도 살아남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다.

이번 제초는 제대로 되서 벼들 사이에서 피를 보지 않았으면,

아빠의 잔소리가 들려오지 않기를 바란다.)


-5월 초 제초를 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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