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에세이
제초가 벼농사의 시작이라면
첫 걸음은 모판만들기 라고 할 수 있다.
모판은 2센티 정도 낮은 높이의 플라스틱 상자인데
이 곳에 흙과 볍씨를 뿌려 모내기를 할 모를 키운다.
이 플라스틱 상자는 오직 모를 자라게 하는 데에만 쓰이기 때문에
(놀랍게도 그 외의 쓰임새를 한국인이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음)
볍씨가 있기 전에도 이름은 모판이고, 볍씨가 자라 모가 되어도 모판이다.
이 모판을 만드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건
모판을 옮기는 자동화기계인데,,
이 기계도 놀랄만큼 쓰임새가 아주 단순하게 모판을 옮기는 것으로만 쓰이기 때문에
1년에 단 하루 이틀 사용되고 창고에 쳐박혀 있다. (딱히 이름도 없다.. 그냥 모판 옮기는 기계..)
일년에 딱 한 번 필요한 모판과 옮기는 기계가 등장함으로써
벼농사의 첫 걸음은 시작된다.
그리고 또 다시 놀라운 세계가 펼쳐지는데..
이 모판과 옮기는 기계는 아주 정교하게 딱딱 이동하기때문에
모판을 집어 넣는 사람.
1차 흙을 붓는 사람.
기계가 물을 잘 뿌리고나면 볍씨를 붓는 사람.
잘 크는 약을 뿌리는 사람.
다시 흙을 붓는 사람.
모판이 기계를 빠져나오면 그것을 받아내는 사람
그 모판을 옮기는 사람.
모판을 받아 쌓는 사람.
최소 8명은 기계가 되어야 하는 세계가 되는 것이다.
기계가 움직이는 속도에 맞춰
모두 기계처럼 움직여야 하는데
중간에 멈추었다가는 모판이 빵꾸가 나기에,
8명은 모두 3시간여동안 쉴새 없이 모판 자동화기계로 변신해야만 한다.
3시간 정도 되니 약 2000여개의 모판이 쌓였고,
볍씨 종류를 바꾸는 과정에서 다행히 쉬는 시간이 발생하였다...
원래 이 일은 최소 8명이 필요하기에
마을 사람들은 서로 품앗이로 일을 함께 해준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도 고령화가 찾아왔고 (농촌에서는 90세까지 일할 수 있음에도)
2개의 자리가 공석이 되어 하는 수 없이 내가 불려왔다.
나는 그렇게 최초로 모판 자동화 기계가 되었다.
나는 멈출 수 없는 그 굴레 속에서 흙을 반복해서 부어내며
스스로 사고를 하려고 애썼으며
그 시간을 인간답게 보내고자 애를 써봤으나
눈 앞의 흙만이 내 전부였고
아래로 쏟아지는 흙이 흥겨웠고
쌓여있던 흙포대가 하나씩 줄어드는 것만이 기쁨이었고
내가 맡은 코너가 빈틈없이 무난하게 흘러가는 것만이 보람이었다.
그렇게 3시간씩 6시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나는 다시 내가 될 수 있었다.
내가 되어 지난 6시간을 생각해보니
멈출 수 없는 것은 결코 고통이 아니었다.
멈출 수 없기에 코 앞에 닥친 흙내음이 기쁨이 되었으니까.
많은 이들이 멈춤을 권하고 쉼을 권하고 천천히를 권하는 사회이다.
하지만 때로는 멈추지 않고 그 길을 계속 가는 것이
또 다른 방식의 치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그때 멈추지 않았다면,
내가 그때 쉬지 않았다면,
내가 그때 계속 그 길을 달려나갔다면,
더 나은 내가 되었을 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 나름의 끝도 꽤나 결국엔 달달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멈추지 않아도 괜찮다.
멈추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
농사가 멈추지 않아야 하는 시간으로 시작이 되기에
어쩌면 오늘 이 곳에 여전히 농부가 있는 것이 아닐까.
멈추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낸 모든 농부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사실 처음엔 모판을 집어넣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가 모판을 3개나 사망시키고.. 쫒겨나 흙을 붓는 자리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