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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작가 박신 Oct 27. 2024

[농사인문학] 벼는 쓰러져도 농부는 쓰러질 수 없다.

#모내기 이 후, 추수를 맞이하는 자세 

#오랫만에 농사 근황을 기록함. 


올해는 시골과 연을 맺은지 12년 중 최악의 흉작이다. 

논에는 며루(?)가 와서 중간중간 바삭 말라버린 구멍이 보이고 

그 덕에 서로 지탱하며 열매를 익어내던 벼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어지럽게 마구잡이 방향으로 쓰러져버린 벼들을 보며 

내 한 자리 잘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 곁의 다른 이들이 충분히 익어갈 시간을 준다는 것.

다른 이들이 잘 버티어준 덕에 나 역시 익어갈 시간을 얻는 것. 

며루 옆에 어지럽게 쓰러진 벼들을 보며 

이런 깨달음(?)을 얻어 

주변인들에게 새삼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시작했다. 

견뎌줘서 감사해요. 버텨줘서 고마워요. 


어찌되었든 추수는 시작되었다. 

이번에 내 역할은. 아쉽게도 없다. 

아빠의 친구분이 오랫만에 고향에 내려와 

아빠의 일 손을 도와주겠다고 한 덕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시골집에서 뒹굴며 

추수의 후기만을 주어담았다. 


800kg포대에 한가득 담아도 키로수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이야기. 

결국 농협에서 600정도만 받아와도 괜찮다고 했다는 이야기. 

비가 자꾸 왔다갔다하니 추수를 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 

여름내내 습하고 더운 날씨 덕분에(반어법) 

논에 온갖 잡초가 들끓었다는 이야기. 


언제나 가을 추수때면 미소가 머물렀던 저녁 식탁에

온갖 걱정과 불안들이 오고간다. 


도시에서 살면서 나름 텀블러 쓰기, 용기 가져다니며 포장하기 등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나름 세련되게 해가며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시골에 오면 직격타를 맞은 기후 위기에 

우리는 아직 어떤 대응법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럼에도, 내 한자리에서 나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는 것.

이 것만이 희망이다. 옆의 누구도 스러지지 않도록.

꼿꼿하게 이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버텨낼테다. 

나를 위해, 당신을 위해, 지구를 위해 

오늘을 잘 서 있어봅시다.

스탠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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