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즐거움

필사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by 한여름

오랜만에 다시 필사를 한다. 현대시를 노트에 베껴 쓴다. 처음 필사를 했던 게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고3 담임을 10년 넘게 맡으면서 대학 입시가 끝난 시기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현대시를 쓰기 시작했고, 벌써 옮겨 쓴 시가 수천 편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권할 수는 없겠지만 현대시를 필사한다는 건 뭐랄까, 다른 사람이 아주 오랜 시간 정성을 담아 만든 식사 한 상을 공짜로 먹는 것과 같다. 그가 목적을 갖고, 메뉴를 정하고, 맛을 낼 여러 재료를 손질하고, 오랜 시간과 노력해서 만들어 낸 정갈한 밥상. 오롯이 작가의 노력이 모여 있는 그 밥상에 살짝 숟가락을 얹는 것이 필사가 아닐까.

흑백요리사의 안성재 셰프처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필요도, 평가할 역량도 없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맛이 있고 없고 느낄 수는 있다. 자신만의 기준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어떤 시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맛인지 모르는 시도 있고, 어떤 시는 늘상 먹어 온 음식인데 이걸 이렇게 만들다니, 하고 감탄하는 시도 존재한다.


그리고 흑백요리사처럼 수많은 요리들이 요리사들의 손에서 샘솟듯 시도 그렇다. 어디 그리 많이 숨어들 있는지 항상 새롭고 멋진 시가 가득하다. 내가 직접 발굴하기엔 시간도 품도 많이 들어 선뜻 나서긴 어렵지만, 남들이 발굴한 좋은 시들, 충분한 문학성과 가치를 지닌 시들을 한 번쯤 옮겨 써 보는 것은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다.


시인의 삶과 경험과 찰나에 대한 감정과 사상과 생각. 그 많은 것들을 정제하고 압축하고 갈고 닦아서 한땀 한땀 빚어낸 게 한 편의 시다. 소설도 좋고 에세이도 좋고 논픽션도 좋지만 아주 짧은 시간에 완전히 다른 세상의 맛을 보기에 한 편의 시만한 게 없다.


오늘 문득 하루가 무료하다면 인터넷에서 아무 시나 찾아서 아무 생각없이 옮겨 써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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