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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Oct 15. 2018

개명 후 달라진 일상

What’s Your Name?

송지효의 본명은 천성임이었다.


그녀는 '송지효'라는 널리 알려진 예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명을 '천수연'으로 개명했다. 배우 김민선은 오랜 기간 본명으로 활동했고, 동명의 배우가 있음에도 개인적인 이유로 '김규리'로 개명했다.


이름이 우리의 일상과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고 중요하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같이 다녔던 '김유미'라는 친구가 있다. 어느 날 수업 때 출석을 부르는데 그녀가 짜증을 팍 냈다.


- 아 진짜 내 이름 저렇게 발음하는 사람들이 젤 싫어.

- 니 이름? 어떻게 불렀는데?

- 저렇게 부르는 거. "기뮤미".

- 아. 그럼 어떻게 불러야 되는데?

- "김뉴미, 이렇게 힘줘서 발음해야지."


한글을 아는 이상 한국 이름을 잘못 부르는 일이 흔치 않은데 그 예쁜 이름에도 그런 남모를 애로사항이 있었더랬다. 나도 이름을 불러줄 때 '안정화'라고 받아 적는 사람들이 많긴 했다. 그 친구 말론 한 학기 한 두 명은 꼭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단다.

이름은 나라는 사람의 간판이자 정체성이다.

이름은 한 사람의 생애와 역사를 담고, 죽은 후에도 나와 뗄 수 없는 아이덴티티 그 자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하지 않는가. 우리는 자연히 이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화여대 교육대학원 김하정의 2003년 논문에 따르면 '청소년들의 초기 친구 관계 형성과 이름의 매력도'에 따르자면, 이름이 멋지고 예쁜 사람들이 촌스러운 사람들에 비해 보다 친구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높다고 한다.

미국에서 살다 보니, 기뮤미는 양반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십 년 가까이 '중가 안'으로 불렸다. 내 이름 '안정아'를 영어로 쓰면 Jungah Ahn. 처음 본 내 이름을 한 번에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 외국인은 십 년 넘게 단 한 명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발음이 쉬운 닉네임인 June을 썼지만, 모든 일상이 나를 아는 사람들과의 울타리에서 이뤄지지는 않는 법이다. 은행을 가도 병원을 가도 어디든 내 정식 이름이 불려야 하는 곳이면 듣는 것이 '중가 안'이었다.


스펠링을 딱 봐도 생소하고 발음이 틀릴 것 같으니 내 이름을 부르기 전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머나먼 타국에서 아무도 제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건 참 불편하고 고독한 일이었다. 평생을 살아도 그곳에 속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일을 하면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한테는 닉네임인 June으로만 불렸다

모든 알바, 인턴쉽, 직장생활 내내 한국 본명은 쓴 적이 없다. 회사 이메일도, 홈페이지 프로필에도, 모든 클라이언트들에게도 June으로만 알려졌다. 미국에선 닉네임으로 불리는 게 흔한 일이지만 그렇게 평생을 살고 싶진 않았다. 고심 끝에 시민권을 신청하며 영어 이름으로 바꾸기로 했다.


정식으로 June이라고 개명을 할까도 생각했다. 준은 한국, 일본 등 아시아에서 많이 쓰는 이름인 동시에 영어 이름이다. Jean과 함께 50~60년대 생들에게 흔했던 여자 이름이다. 하지만 내 성이 안 씨라 잘 안 어울리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대중적인 이름이 아니라서 June이라고 하면 다르게 알아듣는 사람이 많았다.


 스타벅스에 가서 준이라고 하면 Ju, Joo, Jude 등 다양한 이름이 쓰여 있곤 했다.

영어 이름인 June도 잘 못 알아듣던 시절, 스타벅스 컵엔 별의별 이름이  적혀있었다

제시카(Jessica), 제니퍼(Jennifer), 앤젤라(Angela) 같이 이름을 듣는 순간 스펠링을 바로 알 수 있는 이름을 원했다. 미국에서는 은행이나 백화점에 고객상담 전화를 하면 맨 먼저 이름을 물으며 통화를 시작하는데, 그래서 Jungah라는 내 이름은 피차간에 불편했다.


고대 로마 격언 중에 이름이 곧 운명(Nomen est omen)이라는 말이 있다.


오랜 고민 끝에 처음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던 때 지었던 클라라로 결정했다. 중 1 때 친구와 외국어학원을 다녔는데 첫날부터 영어 이름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클라라는 5학년 때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었는데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했던 터라 영어 이름이 필요했을 때 망설임 없이 그 이름을 선택했다. 3년쯤 지나니 왠지 Clara 스펠링이 너무 짧고, 어린 마음에 긴 영어 이름들이 더 이국적으로 보여서 어느샌가 놓았던 영어 이름이었다.


평생 한번 할 개명이니 신중하고 싶었고, 영어권뿐 아니라 다른 여러 언어권에서도 발음이 쉬운 이름이길 바랬다. 찾아보니, 클라라는 영미권, 프랑스, 독일, 이태리, 스페인어권 국가에서도 쓰는 이름이라 다양한 출신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름이어서 좋았다. 한국 사람들이 발음하기에도 수월했다. Clear, Bright, Famous란 이름의 의미도 마음에 들었다. 열세 살 때 영어를 처음 배우던 시절에 지은 이름이라는 게 미국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나에게 주는 의미도 특별했다.


중학교 때 명찰부터 인턴 출입증, 명함까지 나를 스쳐간 이름들
개명 후, 생각보다 많은 일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은행이나 학교에서 상담을 할 때 내 이름을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부를 뿐 아니라 "그런데 클라라, 이 크레디트 카드는 말이야, " 하는 식으로 중간중간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전화로 문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화를 시작할 때 왜 그렇게 내 이름을 묻나 싶었는데, 이렇게 중간중간 이름을 불러주며 친근감을 쌓기 위한 용도였던 것이다. 내 한국 이름은 대화 도중에 한 번도 불려진 적이 없어서 이제껏 모르고 살았다.


이름이 바뀌고 나서야 그동안 내 소개를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위축되고 불편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특이하고 매력적인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자란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다. 물론 특이하고 '이상한' 이름일 경우에 자신감이 떨어져서 사회 적응도가 낮아진다고도 하지만 흔치 않은 이름이면서 본인의 만족도가 높은 경우는 자아확립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는 학업, 직장생활, 인간관계 등 인생의 전반적인 환경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부모님이 센스 있게 지어주는 예쁘고 멋진 이름은 여러모로 한 사람의 일생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이름을 바꾼 후에야 내 이름이 흐릿했던 십 년 동안 내 정체성도 함께 흐려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름을 바꾸니 편해진 건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는 워낙 다양한 이름들이 많아서 수업 첫날 출석을 부르기에 앞서 교수들이 이름의 정확한 발음을 알려달라고 한다. 본명 말고 선호하는 닉네임이 있다면 그걸 알려달라고 하고, 한 학기 내내 그 이름으로 출석을 부른다.


내 이름은 언제나 '난이도 상'이었는데 개명하고 나니 내 이름을 부르는 교수님들의 거리낌이 없어졌다. 사람들이 한 번 듣고 내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나는 그들의 이름을 잘 모르는데도) 이미 내 이름을 기억하고는, "클라라, 우리 페이퍼가 언제까지라고 했지?" 하는 식으로 말을 걸어왔다.


스타벅스나 룰루레몬 매장(탈의실 문에 고객 이름을 적어둔다)에 가도, 내 이름을 말하며 버릇처럼 스펠링을 말하려고 하면 이미 정확하게 적고 있었다.


발음이 쉬운 이름을 갖고 사니 모든 새로운 인간관계 앞에 있던 걸림돌이 없어졌다.


소개를 할 때 늘 본명부터 시작하는데 "내 닉네임이 준인 이유는 본명이 발음하기 힘들어서야"라고 하면 꼭 본명을 물어봤다. 본명을 말해주면 어차피 또 틀리게 발음하고, 그러면 다시 발음해본다고 하지만 또 틀리고. 그러니 굳이 본명은 안 불러도 되고 닉네임으로 불러줘 라는 식으로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어졌다. 준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알던 사람들도 클라라가 나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린다며 내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줬다. 


사람들을 만나는데 마음이 가볍고 자신감이 차올랐다. 뚜렷해진 내 이름과 함께 내 정체성과 자존감도 뚜렷해졌다.

이름이 예쁜 여자들이 그렇지 못한 여자들에 비해서 훨씬 미인으로 인식된다는 연구 결과. Garwood, Cox, Kaplan, Wasserman 그리고 Sulzer(1980)는 여성의 사진이 매력 없는 이름과 연관된 경우보다 매력적인 이름과 연관될 경우 일률적으로 더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중략) 즉, 초기 관계의 호감도 형성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신체적 매력을 인지함에 있어서 개인의 이름 매력도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정말 토니 타키타니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토니 타키타니'는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인 토니 타키타니의 이름을 지은 아버지는 아기가 태어나고 한참 동안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산다. 그러다 문득 이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는 미국식 이름을 지으면 편리할 때가 올 거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아들의 이름을 토니라고 짓는다. 그러나 폐전 직후 일본에서 미국식 이름은 그를 더욱 고독하고 소심하게 만든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단편소설이다. 하루키의 다른 단편 중에는 학창 시절 명찰을 훔쳐간 원숭이가 나오는 것도 있다(시나가와 원숭이). 주인공은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이름과 정체성의 섬세한 관계, 그리고 이름이 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려낸 흥미로운 소설들이다.


다양한 문화권이 존재하는 미국에서는 이름에 대한 다양한 조사가 이뤄지고 있고, 이름과 자존감의 상관관계에 관한 수많은 연구결과와 기사들을 접할 수 있다.

발음하기 쉬운 이름은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
흔한 이름을 가진 이들은 취직이 더 수월하다.
전형적인 백인 이름들은, 전형적인 흑인 이름이나 타 인종의 이름인 경우보다 취직이 더 쉽다.
여자 이름을 가진 남자아이들은 공격적으로 자랄 확률이 있다.
성(姓)이 알파벳 앞 자부터 시작할 경우 좋은 학교에 들어갈 확률이 더 높다.
남자 이름이나 중성적 이름을 가진 여자들은 법조계에서 일할 확률이 높다.
등등의 다양한 연구결과들이 흥미롭다.

얼마  퀴즈   블럭에서 미용실에서 할머니들을 인터뷰하기에 앞서 성함을 여쭙자 다들 이름이 부끄럽다며 꺼리는 장면이 나왔다. 우리 엄마 세대만 해도 본명을 밝히는  싫어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자신의 이름이 촌스럽고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5년 개명 절차가 간소해진 후엔 나이에 상관없이 개명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한다. 출생신고에 잘못 적어서, 발음이 불편하고 어감이 별로여서, 범죄자나 연예인과 동명이인이어서 사람들은 이름을 바꾼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이유 없이 건강이 안 좋아지는 등 개인적인 사유로도 개명을 한다.


이제 우리 가족에도, 주변 친구들 중에도 개명을 한 사람들이 생겨서 어느 날 갑자기 이름이 바뀐 지인이 종종 생긴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 개명한 사람들이 새로운 이름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내 이름에 큰 만족을 갖게 되니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처음부터 자기 이름이 좋았던 사람들은 평생 이런 기분으로 살았을까.


백세시대라는데 맘에 들지 않는 이름을 계속 유지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이름에 불만족스러운 채로 살아가고 있다면 과감하게 개명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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