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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Sep 04. 2024

비오는 날

까만 우산을 쓴 용호와 투명우산을 쓰고 레인부츠를 신은 시원이가 앞에 걸어가고 있다. 아이는 물웅덩이를 한번 첨벙 한다. 나는 우산에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집중한다. 일기예보대로 아침부터 비가 왔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혀 어두컴컴하다. 좋아. 완벽해. 오늘은 막걸리다.


항상 그렇듯 길 건너에서는 명품우산을 든 태연엄마가 셔틀을 기다리고 있다. 저런 우산은 얼마나 하려나. 나는 용호의 회사 로고가 박힌 우산을 물끄러미 본다. 부럽지가 않어. 장기하 노래를 애써 읊조려 본다. 


그 후로 며칠 동안 진수엄마를 마주치지 못했다. 아마도 나를 피해 다닌 거 같다. 피해봐야 아파트 단지지. 결국 그 순간이 오고야 만다. 고개를 돌리자 저쪽에서 우산을 하나씩 쓴 진수와 진수엄마가 고개를 숙이고 오는 것이 보인다. 진수는 파란 바람막이를 입고 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할 생각이었지만 진수엄마의 생각은 좀 다른 거 같다. 나를 보자 곧장 휙 다시 뒤돌아 방향을 튼다. 

“엄마. 엄마아. 어디가.” 진수가 엄마를 애타게 부른다.

“뭐 안 가져와서. 빨리 와.”

진수엄마는 다시 지하 주차장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누가 봐도 일부러 다시 돌아가는 진수엄마의 잰 발걸음에 살짝 어이가 없다. 참나. 이게 그럴 일이야? 뭐 죄졌나.. 좀 오버라고 생각하며 시원이와 용호 뒤를 따라간다. 


--


비가 오는 날은 건조기이모님의 존재가 더욱 감사하다. 나는 뜨끈한 수건들을 꺼내어 바닥에 놓고 갠다. 뽀송하고 따뜻하고 은은한 플로랄 향이 나는 수건들을 개는 건 내가 집안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수건은 다른 옷들과 달리 크기가 일정해서 나란하게 개는 맛이 좋다. 수건장에 차곡차곡 넣어두면 우리집이 깔끔하고 심플한 무지 매장 같은 기분도 든다. 정리를 마치고 거실로 나와 나는 내리는 비를 보며 생각한다. 주종은 막걸리로 정해졌고. 안주는 뭐일까. 축축하고 눅눅한 이 봄비.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은..


나는 냉장고를 열어본다. 김치전은 너무 뻔하다. 비오는 날에 김치전은 고전이지만 창의성이 부족하다. 두부구이는 오늘 내 마음에 너무 라이트하다. 두부김치를 잠시 생각했지만 아이의 저녁도 동시에 해결하고 싶다. 4월의 비는 향긋하고 쌀쌀하다. 뜨끈하고 든든한 것이 필요하다. 탄수화물을 좀 채워주고 싶은 기분이다. 냉동실 보관용기에 보관된 하얀 밀가루가 눈에 띈다. 

“그래! 너로 정했다!!” 나는 또 외쳐본다.


볼에 밀가루를 대충 넣는다. 정수기 물을 조금 넣는다. 나무 수저로 저으면 찢어진 종이처럼 밀가루들이 조금씩 엉겨 붙는다. 물을 더 넣어주면서 더 엉겨 붙게 만든다. 어느 정도 붙었으면 손에 기름을 살짝 묻힌다. 밀가루를 주물주물. 열심히 치댄다. 계속 만지고 치고 두드려서 동글동글하게 만들어본다. 위생팩에 넣고 토닥토닥. 잘자라 반죽아. 냉장고에 넣는다. 


논술 첨삭 알바는 한번 넘겨주면 새로운 일거리가 올 때까지 며칠 시간이 걸린다. 시계가 10시 반을 가리킨다. 아무리 키친드렁커라도 웬만하면 모닝술은 안하려 노력한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좋아. 오늘은 헬스장을 가보자. 더 맛있고 건강한 드렁커의 삶을 위해 일주일에 세 번은 아파트 헬스장에 가는 것이 내가 정한 규칙이다. 물론 운동은 너무 싫다. 정확히 말하자면 운동이 싫다기보다는 운동하러 헬스장에 가기까지가 너무 싫다. 나는 대충 레깅스를 입고 민망함을 가려줄 긴 티셔츠를 입는다. 실내용 운동화를 손에 들고 지하2층으로 꾸역꾸역 내려간다. 따로 기구 운동을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냥 런닝 머신에서 빠르게 걷기 정도가 내가 그나마 억지로라도 할 수 있는 운동이다. 반도 넘게 남은 대출금이 아깝지 않게 헬스장도 열심히 이용해 줘야 한다. 


헬스장에서 태연엄마가 개인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언제나처럼 서로 눈인사만 하고 나는 런닝 머신으로 오른다. 태연엄마의 쭉 뻗은 다리와 가늘지만 탄탄한 팔, 복근이 드러난 브라탑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나는 티셔츠를 쭉 잡아당겨 좀 더 배를 가려본다. 술 배가 뽈록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로 생각하기로 한다. 런닝머신을 속도 6에 놓으면 다리가 자동으로 빠르게 움직인다. 30분만 걷고 막걸리를 사러 갈까나. 묵직하고 구수한 막걸리를 생각하니 입에 침이 고인다. 나는 티비를 켜자 내 최애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가 나온다. 나는 스포방지를 위해 재빨리 다른 채널로 돌린다. 드라마는 몰아보는 편이라 종방을 기다렸다가 정주행을 한다. 중간에 흐름이 끊기는 걸 참을 수가 없다. 돌린 채널에서는 마침 먹방에서 막걸리와 전을 먹고 있다. 너무 클리셰야. 창의성이 부족하군. 하지만 마늘쫑 무침을 곁들인 것은 아주 칭찬한다. 막걸리에는 매콤한 게 있으면 좋다. 아삭한 겉절이. 마늘쫑무침. 고추무침. 이런 것들. 갑자기 매콤함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반찬가게라도 가 볼까. 술과 먹는 소중한 한 끼에 나는 몹시 진심이다. 

-알파논술학원. 530000원 입금.

아주 때맞춰 온 알바비 입금 문자에 기분이 활짝해진다. 반찬가게를 가는 사치를 하기로 결심하고 30분 빠르게 걷기는 20분으로 줄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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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네 반찬가게. 우산 너머로 간판을 올려다본다. 숙희는 진수 할머니, 그러니까 진수엄마의 시어머니 이름이다. 놀이터에서 주워들은 얘기에 의하면 진수 할머니는 이 꼬마빌딩 건물주라고 한다. 홀어머니가 반찬가게를 해서 마켓컬리에 입점도 하고, 외아들 30평 아파트도 해주고, 건물주도 되었으니 아주 성공한 인생이다. 진수엄마가 있나 나는 슬쩍 안을 들여다본다. 없는 듯하다. 내심 아쉽다. 자꾸 피하니까 나도 이상한 오기가 생긴다. 진수엄마는 주로 새벽에 재료를 다듬고 씻고 하는 일을 돕는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놀이터에서 상준엄마에게 주워들은 이야기이다. 


3팩에 만원. 나는 맛깔나 보이는 반찬들을 둘러본다. 꽈리고추찜, 무생채, 매실무침, 그리고 아까 먹방에서 보고 침을 삼켰던 마늘쫑과 오늘 아침에 담은 생생한 겉절이를 담는다. 이미 눈으로 아삭하다.


“오늘 매콤한 거 당기나보네. 겉절이 배추가 달아요.” 

“네. 너무 맛있겠어요.”

“호박 나물은 서비스.”

“어머. 감사해요.”

진수 할머니는 덤을 넣어준다. 나는 가끔 들리는 손님인데도 놓치지 않는다. 시원이 진수와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는 것도 알고 있다. 빨간 반찬에 꽂혀 너무 빨간 것만 담았더니 아이를 위해 호박 나물을 준 것이다. 과연 센스 있다. 반찬가게로 건물주가 될 만하다. 부드러운 이 호박 나물은 흰쌀밥에 참기름 넣고 반숙 후라이 넣고 비벼주면 훌륭한 한 끼가 된다. 내일 시원이 아침 메뉴로 당첨이다. 나는 숙희네 반찬가게라고 적혀있는 하얀 비닐봉지를 받아든다. 그 때 문이 열리고 우산을 접으며 진수엄마가 들어온다. 나를 보고 눈을 피한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안녕하세요.” 나는 일부러 더 밝게 인사한다.

하지만 진수엄마는 마스크 너머 작은 고개의 움직임으로 인사와 동시에 불편함을 표현한다. 

“얘. 너는.. 아니다. 저 쪽에 있다. 그거만 다듬고 빨리 들어가라.”

진수할머니는 진수엄마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나를 한번 흘끔 보고는 말을 아낀다. 진수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조리실 안쪽으로 들어가 등을 돌리고 파 뭉치를 다듬기 시작한다. 진수 할머니 숙희의 얼굴에 못마땅이라고 써 있는 듯하다. 


-- 


오늘도 해피마트로 들어선다. 오늘은 예상보다 늦어졌기 때문에 앞 만 보고 술코너로 향한다. 이러다 비가 그치면 낭패이다. 오로지 비만 보고 주종과 메뉴를 정했는데 말이다. 예보를 확인해보니 다행히 3시까지는 비가 온다고 한다. 하지만 정육코너가 발길을 잡는다. 닭볶음탕용 절단 닭 원쁠원. 원쁠원. 이건 못 참는다. 닭은 목이나 다리를 자른 부분이 붉은 갈색을 띄거나 노란색을 띄는 것을 피하고 살빛이 분홍색을 띄고 껍질이 크림색인 것이 신선한 닭고기이다. 다 비슷해 보이지만 가장 조건에 합당한 두 팩을 집어 든다. 에헤이. 한 눈 팔지 말고 술코너로 가자.


앞서 말했듯이 막걸리는 유통기한이 짧기 때문에 쟁여놓질 못한다. 막걸리는 생물 오징어 고르듯 신중하게 골라야한다. 슬쩍 눌러보고 빵빵한 놈으로 고른다. 빵빵하다는 건 탄산이 빵빵하다는 것. 날짜는 제조일로부터 3,4일 지난 것이 가장 숙성되고 맛있다. 나는 탄산이 많고 단맛이 좀 덜한 것을 선호한다. 건강을 생각해서 성분도 봐야한다. 국산쌀과 무아스파탐, 전통제조방식. 가격은 조금 더 나가지만 이것이 내가 선호하는 막걸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비를 입은 야쿠르트 아주머니와 우산을 쓴 상준엄마가 수다를 떨고 있다. 비도 그녀의 수다를 막을 수는 없다. 돌아오는 길에는 동물병원에 상주하는 갈색 푸들과 인사한다. 비 구경을 하는 꼬불꼬불한 털과 항상 웃상인 표정이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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