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키친드렁커가 되기 위한 십이계명.
첫 번째. 원하는 머리 정도는 뚝딱 해주는 완벽한 엄마가 된다.
두 번째. 아침 공복을 유지한다.
세 번째. 남편을 응원하는 완벽한 아내가 된다.
네 번째. 무알콜 오전시간은 알차게 보낸다.
다섯 번째. 적어도 내 술값은 내가 마련한다.
여섯 번째, 술은 일주일치 정도 계획해서 너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산다.
일곱 번째. 키친을 이용해야한다.
여덟 번째. 멈출 때를 알아야한다.
아홉 번째. 술은 술잔에. 아주 급할 때 아니면 캔으로 먹지 않는다.
열 번째. 진.짜. 멈출 때를 알아야한다.
열한 번째. 흔적은 바로바로 삭제한다.
열두 번째. 내가 먹은 술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
나는 노트북을 오랜만에 켜본다. 윈도우 오프닝 음악이 경쾌하게 들린다. 요즘은 대부분의 일들, 은행업무까지도 휴대폰으로 처리한다. 논술 첨삭 알바는 당근에서 산 구형 패드에 펜슬을 이용한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는 노트북 켤 일이 거의 없었다. 나는 키보드를 손가락으로 쓸어본다. 7년 된 노트북의 익숙한 촉감이 느껴진다. 회사를 그만두고 몇 번이나 소설을 다시 써보겠다고 책상 앞에 앉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임신 중이었고 육아 중이었고 술 마시는 중이었다. 각종 핑계로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었다. 사실은 두려웠다. 사실 제대로 시작해 본 적도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름처럼 평범하고, 또 평범한 내가 소설을 쓰고 글을 쓴다는 게. 누군가가 뒤에서 비웃을 것만 같았다. 더 유명한 신문사의 신춘문예라도 당선이 됐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조금은 자신감이 있었을까. 내 비루한 재능이 평가받는 것, 남들에게 부끄러운 글을 읽히는 것이 두려워 제대로 시작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내가 진수엄마에게 완벽한 키친드렁커의 비법을 전수하겠다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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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렇게 다 친절해요?”
윤희가 처음 우리 집에서 술 마실 때 했던 이야기이다. 이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친절하지만 친절로 끝이다. 놀이터에서 만나고, 마트에서 만나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밝게 인사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혼자가 편하다. 서울대를 다니는 큰애가 있다고 상준엄마를 치켜세우는 엄마들이나, 피티 선생을 굳이 아파트 헬스장에 불러 운동하는 태연엄마에 대해 수근 대는 얘기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 대신 나는 노트북을 켜기로 한다. 나는 그들의 남모르는 취미를 상상해 본다. 그들은 키친드렁커일 수도 있고, 어쩌면 소설을 쓸 지도 모른다.
어린이집 앞에서 윤희가 꽤나 분량이 되는 A4뭉치를 받고 놀라워한다. 파일로 줄 수도 있었지만 책 느낌을 내고 싶어서 일부러 출력을 했다. 며칠 동안 나는 열 두 개의 비법과 그에 맞는 부연설명을 곁들여 글로 정리해 보았다.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새벽 3시까지 한 호흡에 줄줄 써내려간 날도 있었다. 사실 윤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쓰다 보니 내가 재미있어서 계속 써나갔다. 나의 뇌는 손가락을 움직이게 했고 손가락은 하얀 노트북 화면에 활자들을 채워갔다. 혼자 있을 때, 용호와 시원이가 잠 든 후에 나는 써내려갔다. 오랜만에 해방감 같은 것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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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코백에 두 시간 이십분 동안 아주 잘 익은 꽁소주 두 병을 넣고 103동으로 향한다. 오늘은 처음으로 제대로 함.께. 술을 마시기로 한 날이다. 아침에 어린이집 앞에서 윤희는 나에게 바로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에게는 분명 지켜야할 룰이 있다. 윤희는 보통 새벽에 반찬가게에서 일을 하고 아침에 진수를 보내면 그때부터 술을 마신다고 했다. 나는 십이계명의 4번을 강조했다. 오전시간을 참아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나는 어린이집 앞에서 A4뭉치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가 청소와 알바를 했다. 아침 일과를 하며 문득문득 나의 독자가 어떻게 읽을까 기분 좋은 긴장감도 느껴졌다. 다행히 ‘그’ 독자가 흥미 있을 맞춤형 주제와 소재의 글이니 자신감도 피어올랐다. 그리고 11시 50분, 에코백을 챙겨 윤희의 집으로 향한다. 현관문을 연 윤희가 나에게 감상을 말해준다.
“이거 무슨 소설책 같아. 언니. 뭐하는 사람이에요?”
소설책 같다는 말에 나는 살짝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직 알코올을 시작하지 않았는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독자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
“내가 뭐하는 사람이겠어. 그냥 술 먹는 사람이지.”
나는 그렇게 웃어넘긴다. 한 때 소설가를 꿈꿨다는 건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꽁소주와 묵은지 김치찌개를 놓고 앉는다. 두부조림도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개만 까닥 인사하던 사이에다가 살짝 껄끄러운 감정도 있었는데 이렇게 식탁에 마주앉아 있다니 사람일 참 모른다. 지난번보다는 깔끔해진 복도나 집안 상태를 보니 내가 온다고 급히 정리를 한 듯하다. 윤희는 맛있는 걸 배달 시켜주겠다고 하지만 나는 극구 말린다. 완벽한 키친드렁커가 되기 위한 일곱 번째. 키친을 이용해야한다.
“숙희네 반찬가게 김치찌개는 최고지. 게다가 제일 맛있는 찌개는 어제 끓인 찌개라는 말도 있잖아. 어제 끓인 숙희네 김치찌개인데, 이건 뭐. 최고야.”
“언니가 올 때까지 나 안마셨어요.”
윤희는 나의 글을 읽고 아침부터 마시던 술을 12시까지 참아보았다고 한다.
푹 끓인 묵은지 김치찌개는 김치가 씹지도 않고 넘어갈 만큼 부드럽다. 숙희네는 김치도 다 직접 담그는데 김장하는 날은 아예 부지를 빌려서 본격적으로 3-40명 인원이 한다고 한다. 저장고도 근교에 따로 갖고 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숙희네 반찬은 규모다 더 크다. 이 정도면 작은 기업수준이라고 할만하다. 적당한 크기의 돼지고기와 3년 된 묵은지의 조합, 따로 꼬들하게 익혀서 넣은 라면사리의 포만감, 거기에 살 얼은 꽁소주의 알딸딸함. 오랜만에 술친구와의 대화. 술이 들어가면 대강 날씨 이야기나 저녁 메뉴 이야기, 대홍마트에 과일 상태나, 어린이집 이슈 같은 놀이터의 스몰토크보다는 훨씬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윤희는 항상 새벽에는 숙희네 반찬가게에서 파를 다듬고, 무를 채 썰고, 마늘을 다진다. 한식 반찬들은 간단하지만 준비과정들에 꽤나 손이 많이 간다. 고구마 순이라도 들어오는 날엔 손톱 밑이 까맣도록 껍질을 벗긴다고 한다. 그렇게 새벽에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진수를 챙겨 보내고 나면 자유가 찾아온다. 전날 팔고 남은 시어머니 반찬들은 지금 묵은지 김치찌개와 두부조림처럼 그녀의 안주가 된다. 그리고 한숨 자고 마스크를 쓰고 후드를 눌러 쓰고 진수를 데리러 간다. 진수아빠는 반찬 배달을 하고 온라인몰 납품 관리 같은 것을 한다고 한다.
“너무 한심하죠? 우리? 부부가 시어머니한테 다 빌붙어서.”
“왜 한심해. 도움 받을 수 있으면 받는 게 좋지.”
“벗어나고 싶어요. 도움 안 받아도 되니까 독립하고 싶어. 이건 정신도 물질도 전혀 독립이 안 된 나이만 어른이야.”
“원래는 무슨 일했었는데?” 나는 아차 싶어 덧붙인다. “물어봐도 되나?”
엄마들끼리, 특히 전업주부들 사이에선 원래 무슨 일 했었냐고 묻는 것이 실례이다. 본인이 직접 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궁금해 하지도, 묻지도 않는다. 술을 마시니 대강 날씨 이야기나 저녁 메뉴 이야기, 대홍마트에 과일 상태나, 어린이집 이슈 같은 것 보다 더 쉽게 말이 나간다.
“번듯한 회사에 다닌 적이 없어요. 남편도 나도. 여기 동네 엄마들. 다들 가방끈도 길고, 언니도 출판사 다녔으니까 뭐 공부 잘 했겠네요. 내가 잘 하는 건 술 마시는 거 밖에 없어요.” 윤희는 분명 좀 자격지심이 있다.
윤희는 급하게 술을 마신다. 처음 우리 집에서 마셨을 때 느꼈지만 손목 스냅이 남다르다. 앞에 있는 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먹어치우겠다는 기세로 먹는다. 나는 페이스를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12계명 중 8번과 10번이 핵심인데 이것을 지키려면 속도를 너무 내면 안 된다. 내가 천천히 마시자고 아무리 얘기해도 그 때 뿐, 돌아서면 술잔이 비어있다. 나는 결국 저지한다.
“노노. 천천히. 이러다 소주 한 병 10분 만에 먹겠어.”
윤희는 나의 말에 고분고분 소주잔을 내려놓는다. 나는 지난 번 경험으로 소주를 두병 들고 와서 각 일병으로 세팅했다. 한 병으로 같이 나눠먹고 또 다른 한 병으로 같이 먹으면 나는 반병도 못 먹을 기세다. 나는 내 스타일대로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고 싶다. 내가 1000미터 정도의 지구력을 가졌다면, 윤희는 100미터 우사인볼트다. 이렇게는 금방 취한다.
안 그래도 윤희는 그동안 11,12번을 지키지 못해 남편과의 트러블이 많았다고 한다. 출퇴근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자영업자 남편에게 음주를 숨기기는 쉽지 않았다. 언제 집으로 올지 알 수 없는 마당에 급하게 마시니 급하게 취해서 술을 먹다가 잠이 들기 일쑤였다. 널브러진 술병과 술 냄새를 풍기며 대낮부터 소파에서 잠든 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남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알콜성치매라고 소리치던 진수아빠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낮에 먹은 건 낮에 끝내야지. 더 마시면 키친드렁커가 아니라 그냥 드렁커야.”
윤희는 나랑 먹고 끝내기로 굳게 결심한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다시 술 생각이 날 터이니 낮잠을 자지 않기로 한다. 대신 밤에 일찍 자는 게 더 효율적이다. 그럼 새벽에 일어나기도 수월할 것이고 일하러 가기도 힘이 덜 들 것이다. 간은 잘 때 가장 잘 회복된다. 숙면은 건강하게 간을 회복시켜주고 다시 술을 마실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거의 아홉시, 만5세 시원이 자는 시간에 같이 잔다. 윤희는 잘못된 술 습관을 고치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배드 드렁커 한 명을 바른 길로 인도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하다.
좋다.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캔. 삘 받아 한 캔을 더 마셔서 두 캔. 이렇게 마시고 알딸딸하게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기분이 무척 좋다. 같은 동네, 같은 아파트, 같은 어린이집, 같은 80년대 생. 공통점이 많은 우리는 잘 맞는 친구가 된 것 같다. 내가 4살 많지만 같은 또래의 아이를 키우면 사실 엄마들 나이차 같은 것은 느껴지지도 않는다. 상준엄마도 놀이터에서 잘 어울리지 않던가. 나는 어쩐지 설레기까지 하다. 이 말이 나를 설레게 한 것 같다.
이거 정말 무슨 소설책 같아.
우리 집은 3층이다. 이럴 때는 운동도 할 겸 계단을 이용한다. 좁은 엘리베이터에서는 날숨으로 뿜어져 나오는 술 냄새를 감출 수가 없다. 9층에 사는 하율엄마라도 만난다면 소문이 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3층에 시원이 엄마 낮술 먹었더라.” 나는 놀이터의 스몰토크의 주제가 되고 싶지 않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게 계단으로 올라온다.
집으로 들어와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노트북 앞에 앉는다. 시원이를 데리러 가기까지 한 시간 남짓. 식탁에서 다시 오래된 노트북을 켠다. 윈도우 소리에 귀에 울린다. 요 며칠 듣던 소리인데 오늘은 새롭게 들린다. 어쩌면 이것도 소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정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손가락을 위글거리며 하얀 화면을 뚫어져라 본다. 깜빡이는 커서에 맞춰 눈을 깜빡여본다. 그리고는 제목을 천천히 쳐본다. 제목은 생각 할 것도 없이 <키친드렁커>. 손가락이 저절로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춘다. 타닥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팝콘 튀기는 소리로 들린다.
냉동실에 넣어둔 건조 옥수수를 꺼낸다. 달군 팬에 버터를 큼직하게 한 조각 넣고 옥수를 넣는다. 뚜껑을 닫는다. 고소한 버터향이 온 집안에 기분 좋게 퍼진다. 수제팝콘은 아주 아주 간단하지만 맛있는 놀이터 간식이다.
타닥타닥타닥타닥.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완벽한 키친드렁커를 꿈꾸는 평범한 여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