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찜찜한 기분에 윤희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다. 사케를 제일 큰 병으로 사왔기 때문이다. 월계관이 그려진 가장 대중적인 사케를 이자카야에서 먹으면 사만 원쯤 하지만 마트에서는 단돈 만 오천 원에 살 수 있다. 나는 어제 행복마트에서 커다란 사케를 데려와 나의 김냉 보물창고에 넣어두었다. 항상 사보고 싶었지만 너무 큰 병이라 한 병을 혼자 다 먹기는 부담이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항상 종이팩 사케를 먹었었는데, 이제는 나눠 먹을 수 있는 술친구가 있다. 꼭 필요에 의한 초대만은 아니다. 거의 매주 만나다가 몇 주간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너무 티 나게 거리를 뒀나 하는 찜찜함도 한몫했다. 아침 일찍 이따 우리 집에 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따’라는 시간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12시이다. 윤희는 오랜만에 좋다고 신난 이모티콘을 잔뜩 날렸다. 이제 진수는 붕대를 풀고 잘 걸어 다닌다.
나는 냉동 참치를 살짝 해동한다. 해동되는 사이 간장, 물, 레몬즙, 꿀, 후추, 깨를 섞어준다. 언제나 계량 따위는 필요 없다. 짜면 물을 더 넣고 싱거우면 간장을 더 넣는다. 키친타올로 해동된 참치 덩어리의 물기를 좀 빼주고. 토치로 골고루 사면을 굽는다. 겉이 색이 변하면서 익어가고 참치 기름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그만 굽고 모양을 일정하게 자른다. 겉과 속이 다른 색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만은 심심하니 냉장고에 있는 양상추, 새싹 같은 채소들을 곁들인다. 일정한 모양을 접시에 빙 둘러 담아본다. 정말 간단하지만 폼 나는 사케 안주, 참치 타다끼이다. 두 덩어리는 남겨둔다. 저녁에 용호의 회덮밥, 시원이는 참치구이로 탈바꿈 할 것이다. 이걸로 오늘의 키친은 완벽하게 준비된다.
안주를 만드는 것은 행복하다. 보통은 술을 먼저 정하고 어울리는 안주를 정한다. 그날의 날씨, 온도, 습도는 오늘의 술을 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물론 행복마트의 세일이나 오늘의 기분 같은 것도 주종을 좌지우지한다. 조화롭게 먹을 기대감으로 내 부엌은 가득찬다. 윤희는 요리라면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하긴 매일 비슷한 반찬냄새를 맡으면 누구라도 진력날 것이다. 뭐든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면 싫은 법이다. 소설을 쓰는 것도 그러려나. 아직은 모르겠다.
나는 내 소설 <키친드렁커>의 마무리를 아직 쓰지 못했다. 정신없이 진도가 나가다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완벽한 키친드렁커를 꿈꾸는 주인공이 꿈을 이뤄야 할지 혹은 정체를 들켜야할지 정하지 못했다.
시계가 열두시가 지나고 열두시 십오 분이 다 되어도 벨이 울리지 않는다. 이상하다. 윤희에게 참치 타다끼 사진을 보낸 톡에 숫자 1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나는 더는 못 기다리고 한 점 입에 넣는다. 부드러운 참치기름의 비릿한 맛이 입에 퍼진다. 김냉에서 차가워진 사케는 소주보다 부드럽다. 안주도 술도 이가 없어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럽다.
열두 시가 땡 하면 오던 윤희가 이십 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무슨 일인 걸까. 나는 그렇다고 집에 가보기엔 부담이다. 앞서 말했지만 출퇴근이 불규칙한 진수아빠를 마주칠 수도 있다. 전화를 해 볼까. 생각해보면 윤희랑 통화를 해 본 적은 없다. 갑자기 진수아빠라도 왔거나 숙희네 반찬에 가야 하는 일이라도 생겼나보지. 나는 이런저런 가능성들을 생각하다가 그냥 오늘은 혼자 즐기기로 한다. 뭐 별일이 있을까. 나는 노트북을 켠다. 오늘, 소설의 마무리를 써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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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 반. 하원 알람이 울린다. 나는 노트북을 덮는다.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올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마무리를 지었다. 사케 병을 기울여 잔에 따르는데 병 엉덩이가 90도까지 기울여진다. 쓰면서 몰랐는데 그 큰 병의 사케를 혼자서 홀짝홀짝 다 마신 것이다. 혼자서도 되는 거였네? 이걸 병을 낸 나 자신, 기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휴대폰을 보니 윤희에게선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다. 카톡의 숫자 1은 사라져있다. 무슨 일이 진짜 있나. 나는 치카치카를 하러 간다. 양치질이라는 말이 이제는 낯설다. 치카, 응가, 쉬. 화장실 용어들은 아기용으로 바뀐 지 오래다.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얇게 펴 발라 발그레한 볼을 감춘다. 됐어. 완벽해.
완벽한 키친드렁커가 되기 위한 열두 번째.
내가 마신 술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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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하며 선생님께 물으니 진수는 아침에 아빠가 데리고 갔다고 한다. 아침에? 예감이 별로다. 혹시라도 윤희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으려나 하는 기대감으로 놀이터로 향한다. 더워진 날씨에 엄마들은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선글라스와 헬렌카어쩌구 하는 어려운 이름의 밀짚모자가 놀이터에 등장하기 시작하면 완전한 여름이 온 것이다. 얼굴에 열이 오른다. 날이 더워지면 어쩔 수 없이 술기운이 얼굴을 달군다. 시간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여름에는 하원 전에 술기운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그 큰 병을 다 마셨으니.
나는 여느 때처럼 엄마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늘에 선다. 대강 날씨 이야기나 저녁 메뉴 이야기, 대홍마트의 과일 상태나, 어린이집 이슈 같은 놀이터의 스몰토크를 나눈다. 나는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듣는다. 먼저 진수의 오전 하원에 대해 묻거나 할 생각은 없다. 아이들은 덥지도 않은지 땀을 뻘뻘 흘리며 잡기놀이를 한다.
시간이 되자 나는 시원이의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으로 나간다. 용호가 오랜만에 일찍 온다 하여 마중을 나간다. 집에서 2분 거리 버스정류장 위로 노을이 내리고 있다. 저기 용호가 내린다. 우리 셋은 서로 반갑게 인사한다.
“안녕. 사랑해. 텔레파시. 삐용삐용 이이잉---”
완벽한 저녁이다.
나와 용호는 시원이의 손을 양 쪽에 하나씩 잡고 공중에 띄워주며 집으로 향한다. 오늘따라 노을이 예뻐 지하주차장이 아니라 지상 입구로 들어가기로 한다. 그런데 103동 앞에서 노을이 아닌 인공적인 빛이 번쩍번쩍 하고 있다. 사이렌이다. 구급차가 와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 쪽을 향해 있다. 불안한 기분이 엄습한다. 설마. 나는 윤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윤희는 남편이랑 싸우고 이전에 죽으려고 한 적이 있다고 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시원이를 안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시절을 떠올렸다. 사람은 누구나 깊은 동굴로 들어갈 때가 있는 법이다. 설마. 설마. 불안한 마음이 가슴을 쿵쿵 친다.
나는 놀란 얼굴로 사설 구급차 가까이 가본다. 주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며 한 번씩 들여다본다. 아무도 없다. 일단 안도감이 밀려온다. 그 때, 곧 103동 공동현관의 문이 열리고 간호복을 입은 덩치가 큰 남자들의 손에 이끌려 윤희가 나온다. 윤희의 꼴은 엉망이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손에서는, 또 무릎에서는 피가 나고 있다. 시어머니 숙희가 뒤따라 나오고 진수아빠가 뒤이어 나온다. 희번덕거리는 눈빛의 윤희는 미친 사람처럼 간호복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 그녀는 애원하듯 소리친다.
“아니야! 나 아니라고!! 여보. 제발. 술 끊을게. 제발. 어머님. 제발.”
“시끄러. 빨리 태우세요!”
숙희의 날카로운 고함에 동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상준엄마는 아주 동그란 눈으로 어머어머를 남발하고 있다. 나는 용호와 시원이에게 먼저 집에 들어가라고 하고는 무슨 일인가 다가간다.
“뭐.. 뭐에요?” 나는 이미 자리를 잡고 구경하고 있는 상준엄마에게 묻는다.
“세상에. 알콜 중독 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나봐. 진수엄마.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알콜 중독자래.”
“예전에도 입원한 적 있었다나 봐요.” 다른 엄마도 한마디 얹는다.
나는 띵.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다. 내가 먹은 술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 12번을 지키지 않은 것인가.
그때 윤희와 눈이 마주친다.
“윤희야.”
나는 나직이 이름을 부른다. 상준엄마를 의식해 진수엄마라고 불렀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불렀다. 이젠 진수엄마보다 윤희가 더 익숙한 탓이다. 상준엄마가 의외라는 듯 나에게 시선을 꽂는다. 눈빛에 흥미가 가득하다.
“윤희? 진수엄마 이름이 윤희야?”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윤희의 눈빛은 나에게 구해달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을 변호해달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육아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먹는 것도 아니고, 건강을 생각하면서 안주도 거의 만들어 먹고, 경제를 생각하면서 알뜰하게 마시고,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알콜 중독자가 아니라 키친드렁커일 뿐입니다.”
이렇게 윤희를 위한 변명을 해주어야 한다. 내 입술이 달싹거린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 내 정체도 밝혀야 한다.
나의 망설임을 캐치한 윤희의 눈빛이 싸늘하게 바뀐다. 서슬이 퍼런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눈물이 고인 눈이 번들번들하다. 윤희의 손가락이 나를 향한다.
“저 여자야! 저 여자가 나 낮술 먹인 거야. 진수아빠. 내가 먹은 거 아니야. 나 중독 아니야!!”
윤희는 나를 가리키며 진수아빠에게 애원한다.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어느새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향한다. 집에 들어가던 용호도 놀란 얼굴로 진수엄마와 나를 돌아본다.
잠깐 사이. 내 머릿속은 요동친다. 혼자 죽지 않겠다는 작전인가, 물귀신처럼 나를 끌고 가겠다는 작전인가. 나는 그 물에 함께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혹은 윤희의 손아귀에 잡힌 옷자락을 벗어내야 할 것인가. 윤희를 위한 변명으로 달싹거리던 내 입술은 나를 위한 변호로 열린다. 나는 비로소 입을 뗀다.
“무슨 소리에요. 진수엄마.”
내가 선택한 것은 할 수 있는 가장 차가운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항상 헤헤실실 웃고 다니는 내 입 꼬리는 티가 나게 비틀어진다. 손이 떨린다. 나는 양손을 서로 꼭 쥐어 떨림을 숨긴다. 윤희, 아니 진수엄마도 떨리는 몸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한 번 더 입을 뗀다.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상준엄마에게 말한다.
“진짜 미쳤나봐. 안 그래요. 언니?”
나는 처음으로 상준엄마에게 언니라고 부른다.
간호복을 입은 남자가 윤희의 머리를 찍어 누르듯 구급차에 밀어넣는다. 윤희는 머리부터 숙여져 차에 억지로 태워진다. 드르륵 탁! 승합차의 문이 닫힌다. 진수가 어느새 내 옆에 서 있다. 나는 진수의 눈을 가려준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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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기한테 그런 말을 한 거야. 그 여자는?”
저녁식탁에서 용호가 묻는다. 나는 계획대로 용호에게는 참치회덮밥, 시원이에게는 참치구이를 내 놓는다. 옅게 끓인 미소된장국도 곁들인다. 무슨 정신으로 저녁을 차렸는지 모르겠다. 낮에 혹시나 해서 덜어놓은 참치 타다끼 1인분은 냉장고 안에서 차갑고 딱딱하게 식어 있다. 나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에 그것을 쓸어 넣는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몰라. 오며가며 놀이터에서 만난 게 단데. 옛날부터 좀 이상했어.”
나는 얼버무린다. 용호는 별 의심 없이 된장국을 마신다.
“좀 싱겁다. 오늘 된장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