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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Sep 04. 2024

나는 완벽한 키친드렁커를 꿈꾼다.


이 사건은 한동안 아파트를 후끈 달궜다. 상준엄마는 놀이터 그늘 아래에서 신나게 떠들어댔다. “내가 봤잖아.”라던가. “알콜중독 그거 정말 무서운 거야.”라던가. “아니 그 여자는 왜 하필 시원엄마를 끌어들였을까.”라던가. 몇 번이나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떠봤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러게요.” 정도의 맞장구로 끝끝내 벽을 지켰다. 내가 그 날, 그 장소에서, “윤희야.” 라고 부른 것이 아마도 화근일 것이다. 보통 “진수엄마”라고 부르는 사이에서 “윤희야.”라는 호칭은 가까운 사이임을 반증했다. 상준엄마가 나를 의심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합리적 의심이었다. 그렇다고 놀이터를 피하는 방법은 적절치 못했다. 더 강한 의심만 살뿐이다. 나는 평소와 같이 놀이터 그늘 아래에서 웃고 지낸다.


숙희네 반찬가게는 전혀 타격이 없었다. 오히려 사건의 전말을 듣고 싶어 하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반찬을 사가고 숙희를 위로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먹어보면 반찬 맛이 일품이네?! 그리하여 단골이 더 많아졌다. 숙희네는 여전히 온라인 입점과 배달, 오프라인 장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숙희는 반찬가게에 오는 사람들에게 며느리 욕을 했다. “하루 종일 술만 먹더라고. 정신병이야. 정신병. 이래서 집안에 사람이 잘 들어와야 돼.”


새벽에 파를 다듬고, 무를 채 썰고, 마늘을 다지는 역할은 젊고 예쁘장한 필리핀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미성년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려 보였는데, 지방이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필리핀 종업원은 조금 생경한 기분도 들었다. 그녀는 영어 시터 역할도 병행했다. 소동 후에도 진수는 어린이집에 계속 나왔다. 처음 며칠은 진수 아빠가 아침에 일찍 등원을 시키고, 메인 하원시간인 4시를 피해 하원했다. 다른 학부모들과 마주치기 껄끄러워서 유동인구가 많은 시간을 피했을 것이다. 며칠 뒤에는 그 필리핀 여자아이가 와서 어설픈 한국말로 선생님에게 말했다. 

“진수. 진수 집에 가. 아임 진수스 시터.”


진수가 놀이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진수가 그렇게 잘 놀고 명랑한 아이인 줄 몰랐다. 항상 엄마 손에 이끌려 집으로 갔던 진수는 놀이터에서 환하게 웃었다. 필리핀 여자아이의 이름은 소피아라고 했다. 시원이는 좋아하는 만화캐릭터 공주이름이라고 좋아했다. 피부색만 다르지 크고 빛나는 눈이 소피아 공주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모두들 처음에는 살짝 경계했지만 소피아에게는 큰 무기가 있었다. 바로 영어. 집에서 엄마표 영어를 하는 상준이나, 모든 동영상은 영어로만 보여준다는 지율이, 영어유치원의 파닉스 수업을 일주일에 세 번 듣는 아현이의 엄마는 “가서 같이 놀아.” 하며 은근히 소피아 옆으로 아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소피아는 젊고 밝은 에너지로 점점 놀이터의 꽃이 되어갔다. 언어가 빠른 아이들은 미끄럼에서 “슬라이-ㄷ 다운!” 그네에서 “스윙!”을 외쳤다. 점점 대놓고 소피아는 진수네 집에서 사는 듯 했지만 다들 모른 척 했다.


차마. 나는 한동안 술을 마시지 못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내가 닦아놓은 완벽한 키친드렁커의 길에 갑자기 끼어들어 그 길을 파괴하려한 윤희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의 사정에 나까지 물귀신 작전으로 옷자락을 잡아끌려고 했던 것이 기가 찼다. 나는 좋은 마음으로 그녀에게 키친드렁커의 길을 열어 준 것이었는데. 그녀는 나를 같이 늪으로 끌어들이려했다. 나는 그녀가 붙잡은 옷자락을 벗어버렸지만 말이다. 


나와 술을 마시고도 아마도 집에 가서 전처럼 더 마셨을 것이다. 10번, 11번, 12번을 지키니 남편과 열 번 싸울 것이 다섯 번으로 줄었다고 한 것도 거짓이었을 것이다. 나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한 말도 거짓이었을까. 


스스로 방어적 자격지심이라는 윤희의 벽은 아마도 그날, 지하주차장에서 내가 검은 봉지에 바지락 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날, “그럼, 한잔 하고 가요.”라는 말에 무너졌을 것이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듣고 싶었던 말. 그 말을 해 준 내 앞에서는 완벽한 키친드렁커를 연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설령 집에서는 다시 알콜중독자의 모습으로 돌아갔을지라도. 하지만 그 날, 엠뷸란스에 억지로 태워지던 날, 나를 향한 윤희의 서슬 퍼런 눈빛은 소위 말하는 상대적 박탈감이었다. 그 눈빛은 같이 술을 마시는데 왜 너만 행복하냐고 묻고 있었다. 같이 키친드렁커인데 왜 나만 병원에 끌려가야 하냐고 책망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나의 행복을 미안해해야 하는 걸까. 같이 불행했어야 하는 걸까. 


나의 소설 <키친드렁커>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했다. 정체를 들키지 않고 완벽한 키친드렁커로 남는 엔딩. 나는 나의 주인공을 응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윤희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윤희는 휴대폰도 빼앗겼는지 병원으로 간 이후 연락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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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준엄마가 태연엄마의 sns에 주기적으로 악플 디엠을 보낸 사건이 발생하자 진수네 일은 금방 잊혀졌다. 놀이터에서 살벌한 싸움이 일어났다.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태연엄마의 화장기 없는 얼굴을 그 때 처음 보았다. 경찰까지 와서 말려 겨우 사태가 진정됐다. 결국 상준이네는 도망치듯 이사를 갔다. 상준엄마는 놀이터에서만이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말이 많았나보다. 여전히 태연엄마는 아침부터 풀세팅을 하고 태연이의 영어유치원 셔틀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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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슬고슬 한 밥에 기름 뺀 참치를 넣고 마요네즈를 듬뿍 뿌린다. 김가루와 통깨를 넉넉히 뿌린 뒤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버무려 한입크기로 뭉친다. 참치주먹밥이다. 주먹밥만은 아쉬우니 소시지를 칼집을 내어 한번 데쳐낸다. 문어소시지지만 눈알까지 붙이기엔 너무 시간이 없다. 용호의 퇴근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도시락 통에 눈알 없는 문어소시지와 주먹밥을 넣고 보자기로 싼다. 


상준엄마가 없는 놀이터는 조금 시들해졌지만 언제나 누군가를 대체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요즘은 우리 동 9층 하율엄마가 슬슬 놀이터의 중심으로 각광받고 있는 듯하다. 다행히 요즘 시원이는 놀이터보다는 자전거에 빠져있다. 네발자전거를 시작했는데 직선 길은 제법 잘 달린다. 헬멧을 쓰고 무릎보호대를 하고 팔꿈치 보호까지 하고 나서는 모습이 꽤나 비장하다. 나는 따릉이를 빌려 앞 바구니에 도시락 통을 넣는다. 두 시간에 천원에 빌릴 수 있는 따릉이는 개인적으로 서울시 정책 중에 가장 환영하는 정책이다. 우리는 하원 후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나간다. 


시원이 자전거 실력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한강까지는 자전거를 타지 않고 끌고 나간다. 마포에 사는 가장 큰 장점은 한강을 가까이서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대출금이 가득한 이 집을 그 때 산 것은 내 인생에서 제일 잘 한 일이다. 지금 같으면 아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9월 저녁, 자전거 위에서 맞는 한강의 가을바람은 기분 좋게 선선하다.


우리는 용호의 퇴근시간에 맞춰서 성산대교 쪽으로 달린다. 용호도 역시 따릉이를 빌려 타고 상암동에서부터 달려온다. 우리는 요즘 종종 이런 식으로 망원지구에서 만난다. 만나면 역시 인사 율동으로 격하게 서로를 반긴다. 

“안녕. 사랑해. 텔레파시. 삐용삐용 이이잉---”


용기에 라면과 스프를 넣고 조리기에 올려주세요. 조리시작 버튼을 눌러주세요. 계란은 30초 남았을 때 넣고 반드시 저어주세요. 삐-소리가 나면 조심히 꺼내주세요. 조리법을 따르지 않아 용기가 탈 경우, 라면 및 용기를 새로 제공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라면, 용호는 안성탕면이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전국 라면지도’를 보면 전국 모든 지역에서 신라면이 1위인데 희한하게 오직 경상도만 안성탕면이 1위이다. 경북 출신의 용호 또한 안성탕면만을 고집한다. 안성탕면에 계란을 마구 풀어 걸쭉하고 구수한 스타일. 영 내 취향 아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많은 것들이 맞춰졌지만 라면만은 맞춰지지 않는다. 나는 신라면파다. 계란도 넣지 않고 깔끔한 신라면을 선호한다. 집에서 끓일 때는 파를 잔뜩 넣고 청량고추까지 넣지만 한강에서는 오리지널로 먹는다. 아직 매운 것을 못 먹는 시원이는 짜장 컵라면을 먹는다. 눈알 없는 문어소시지와 주먹밥도 꺼낸다. 


망원지구로 달려오는 이유는 또 하나. 생맥주가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자전거를 내달려 한강 위에 둥둥 뜬 빠지에서 먹는 생맥주는 설명이 필요 없다. 용호는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가끔 회식에서 술을 마실 일이 있어도 핑계를 대며 빠져나온다. 코로나 이후 가장 많이 바뀐 것이 회식 문화라며 좋아했다. 술자리도 많이 하지 않을 뿐더러 한다고 해도 강요하는 문화가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 용호도 이 노을과 라면에는 맥주를 안 마실 수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두 잔을 들고 온다. 자전거도 음주운전이니 딱 한 잔씩만. 성산대교 너머로 지는 해가 빨갛다. 투명한 테이크아웃 잔에 맥주가 가득 따라져 나온다. 나는 물끄러미 맥주 그 너머를 본다.


한 여자가 지친 얼굴로 맞은편에 앉아 맥주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옆에는 유모차가 있다. 나는 여자의 서사를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여자는 한참을 보더니 잔을 들고 단숨에 맥주를 넘긴다. 꿀꺽꿀꺽꿀꺽꿀꺽. 울대뼈가 꿀렁인다. 


“안 마셔? 여기 생맥주 좋아하잖아.”

나는 용호에게 웃어 보인다.

“고마워.” 

하지만 마시지는 않는다. 금빛 액체에 노을이 내려앉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다.

“요즘 뭐 써? 노트북이 계속 나와 있더라?”

“아. 나.. 다시 소설 하나 써볼까 끼적이고 있어.”

“정말?”

“요즘 시원이도 어린이집 가고 시간도 많고. 알바 좀 줄이고 해보는 중이야. 다시 공모전 하나 해볼까 해서..”

“잘 했네.”

용호는 항상 그렇다. 잘했다. 좋네. 괜찮아. 우리 결혼이나 할래. 너 하고 싶은 거 해. 천성이 여유롭고 모든 게 조급하지 않다. 놀이터에서는 내가 용호 흉내를 낸다. 괜찮아요. 좋아요. 내가 무얼 하든 응원해주는 용호는 완벽한 남편이다. 이 정도면 무척 행복하다. 


언니. 그 필리핀 년 우리 집에 와있는 거 맞지.


며칠 전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었다. 나는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삭제 버튼을 눌렀다. 이 막장드라마 같은 전개에서 나는 빠지기로 했다. 나는 진수아빠가 윤희를 강제 입원 시킨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는 느낌을 몇 번이나 받았다. 그리고 내 느낌이 맞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소피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삭제 버튼을 눌렀다. 나는 다시 완벽한 키친드렁커가 되어 왼손이 마신 술을 오른손이 모르게 할 것이다. 같은 키친드렁커라도 다 같은 키친드렁커는 아니다. 나는 내 소설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꿀꺽꿀꺽꿀꺽. 단숨에 맥주를 넘겨본다. 울대뼈가 꿀렁인다. 윤희 사건 이후 거의 두 달 만에 맥주에 입을 댄다. 여전히 술은 죄가 없다. 술을 먹고 운전하는 게 술 잘못인가. 술 먹고 운전하는 사람이 잘못이지. 낮에 키친에서 드링크 하는 게 술 잘못인가. 술 먹고 자기 할 일 못하는 사람이 잘못이지. 저 여자는 술 먹어서 저래. 저 여자는 술 취해서 저래.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다. 


나는 완벽한 키친드렁커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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