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함

이 순간은 그 어떤 명품 구두 부럽지 않다.

by 필명 미정

가을비가 유난히도 많이 내리던 날 아침,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는 출근길이 몹시도 심란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런 날은 옷이며 가방이며 신발이며 모두 홀딱 젖어버리겠다고 불평하는 내게, 남편은 장화를 신고 가라고 조언을 한다.


아 맞다. 나 장화 있었지. 특별한 것을 발견한 듯 신이 나서 신발장 안에 고이 모셔둔 장화를 꺼내 신었다.


내 장화는 무릎까지 오는 긴 장화다. 검은색 무광의 아무 무늬 없는 장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축축함 속에서 종아리까지 감싸주는 장화의 그 뽀송한 느낌이 내 기분을 한껏 좋아지게 만들었다.


집을 나선다. 집에서 회사로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역까지 10분 조금 더 걸어야 한다. 그 10분 동안의 길에는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그런데 그 공원길은 온통 흙길이다. 평소에 나무에 둘러싸여 상쾌한 공기를 맡는 일과, 흙을 밟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데, 비가 오거나 비가 온 뒤는 예외다. 흙길이 온통 진흙이 되어 있어 신발이며, 옷이며 전부 지저분해지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공원으로 들어서는 나의 발걸음이 당당하다. 아니나 다를까 공원은 온통 진흙길이 되었고, 울퉁불퉁한 곳은 물이 잔뜩 고여, 지나갈 수 없이 큰 물웅덩이가 고여버렸다. 큰 물웅덩이를 보자 발걸음이 머뭇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나는 장화를 신은 자가 아닌가. 당당히 물 웅덩이를 헤쳐 지나갔다. 이 순간은 그 어떤 명품 구두 부럽지 않다. 신발 하나가 이렇게 든든할 수 있는가.


든든함 : 어떤 것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이 허전하거나 두렵지 않고 굳세다.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물웅덩이와 진흙이 가득한 공원을 빠져나와 지하철로 가는 길이, 어쩐지 이날만큼은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그 어느 길도 헤쳐나갈 수 있는 나인데, 벌써 지하철역에 도착했다니.


지하철을 타고 보니, 사람들의 젖은 신발이 눈에 들어온다. 신발은 물론 바짓가랑이까지 홀딱 젖어 있다.


그런데 장화를 신은 사람들이 한 명도 안 보인다. 나와 함께 출근길을 동행하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장화를 사라고 소리치고 싶다.


'장화를 신으면 출근 길이 이렇게나 든든하답니다!'


장화를 신는 날이면 나는 마치 장화 장수처럼 장화를 신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떠들곤 한다. 장화의 쾌적함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늘 알리지만, 내 이야기를 통해 장화를 산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장사에 소질은 없는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장화 덕분에 출근길이 그 어떤 날보다 든든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장화를 신고 가라고 말해준 남편에게 감사함을 보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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