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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소설, '노찬성과 에반'의 문장들

by 글쓰는 민수샘

내년 문학 교과서 선정을 위해 작품들을 훑어보다가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 실려 있는 단편 '노찬성과 에반'이 눈에 띄었다. 교과서에는 중간의 일부분만 나와 있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집을 빌려 전편을 읽었는데, 정말 좋았다. 인물, 사건의 설정과 주제도 물론 인상적이었지만 상투적이지 않은 신선한 문장들이 정말 정말 좋았다.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두세 번씩 눈에 담은 문장들을 잊지 않기 위해 적어 본다. 소리 내어 읽어보니 영화 '노찬성과 에반'의 예고편 같다. 소설에서 가장 의미 있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처럼 작가가 정성을 다해 길러내어 마름질하고 광을 낸 문장에선 맑고 부드러운 향기가 난다. 문학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잔잔한 전율이다.



* '노찬성과 에반' 중에서


그 시절은 찬성은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몇 가지 깨달았는데, 돈을 벌기 위해선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인내가 무언가를 꼭 보상해 주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찬성은 그곳에서 새소리와 바람 소리, 자동차 배기가스와 어른들의 하품을 먹고 자랐다. 환한 대낮, 차 안에서 일제히 잠든 이들은 모두 피로에 학살당한 것처럼 보였다. 혹은 졸음 쉼터 자체가 자동차 묘지 같았다. 찬성이 떼를 쓰거나 큰 소리로 울면 할머니는 입술에 손을 대며 무섭게 다그쳤다. 당시 찬성이 맡은 가장 중요한 일은 잘 크는 것도 노는 것도 아닌, 어른들의 잠을 깨우지 않는 거였다. (42~43쪽)


잠이 오지 않을 때 찬성은 어둠 속 빈 벽을 바라보며 자주 잡생각에 빠졌다. 그럴 땐 종종 할머니가 일러준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다.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은 나중에 어떻게 되나. 그런 건 모두 어디로 가나. 하나님은 어째서 할머니를 자꾸 봐주나. 둘이 친한가 하고. (45~46쪽)


문득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찬성이 에반의 정수리를 가만 쓰다듬었다. 에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반대로 눈꼬리는 부드럽게 처져 사람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찬성이 고개 들어 남은 거리를 살폈다. 미지근한 논물 위로 하루살이 떼가 둥글게 뭉쳐 비행했다. 마치 허공에 시간의 물보라가 이는 것 같았다. (58쪽)


찬성이 몸을 돌려 에반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서로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네가 네 얼굴을 본 시간보다 내가 네 얼굴을 본 시간이 길어...... 알고 있니?'

에반의 젖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들거렸다. 찬성이 에반의 입매, 수염, 콧방울, 눈썹 하나하나를 공들여 바라봤다. 그러자 그 위로 살아, 무척, 버티는, 고통 같은 말들이 어지럽게 포개졌다.

- 있잖아, 에반, 나는 늘 궁금했어.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픈 건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걸까?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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