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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한 소설가는 시인처럼 유혹한다

- 김애란 소설의 질투 나는 문장들

by 글쓰는 민수샘

소설집 「바깥은 여름」을 도서관에 반납하기 전에, 표시해 둔 문장들을 옮겨 적는다. 소설 속에서 이야기의 앞과 뒤를 잇는, 인물의 안과 밖을 비추는 명징한 문장인 동시에, 하나씩 덜어내어 아무 맥락 없이 읽어도 가슴 속에서 북소리를 울리는 힘을 지녔다. 적절한 제목만 붙이면 멋진 산문시가 될 것이다. 이래서 '김애란, 김애란' 하는구나!


작년 가을에는 한강의 소설을 모두 읽었는데, 올해는 김애란 작가의 단편과 장편까지 다 읽어볼 생각이다. 소설 속의 문장에 붙들려 시인처럼 아련해지고, 시집을 읽다가 한 편의 시에 빠져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 노련한 소설가는 시인처럼 유혹하고, 타고난 시인은 소설가처럼 음흉하다.


<건너편>


이날 두 사람은 평소보다 달게 잤는데, 저녁상에 오른 나물 덕이었다. 도화는 밤새 내장 안에서 녹색 숲이 오래 타는 기운을 느꼈다. 낮은 조도로 점멸하는 식물에너지가 어두운 몸속을 푸르름하게 밝히는 동안 영혼도 그쪽으로 팔을 뻗어 불을 쬐는 기분이었다. 잠결에 자세를 바꾸다 도화는 속이 편하다는 느낌을 몇 번 받았다.


일본 어느 도시에서는 벚꽃이 피었다 하고, 뉴욕 한낮 기온도 십팔 도를 넘었다 했다. 여러모로 올 거울은 겨울 같지 않았다. 파이프에서 물이 새듯 미래에서 봄이 새고 있었다. (86~87쪽)


도화는 잘 개어놓은 수건처럼 반듯하고 단정한 여자였다. 도화는 인내심이 강했고, 인내심이 강했기 때문에 쾌락이 뭔지 알았다. (97쪽)



<지나가는 손>


시간이 매일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기분이었을 거야. 복잡하고 어려운 숙제가 생긴 것 같은. (203~204쪽)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213~214쪽)


그래, 엄마랑 아빠는 … 지쳐 있었어.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214쪽)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내 몸이 다 자라기 전, 적어도 중학교 때까지 나는 엄마를 그렇게 올려보는 일에 익숙했다. 그런 시간이 있었다. 사람 얼굴을 보려면 자연스레 하늘도 같이 봐야 하는. 아이들을 길러내는 세상의 높낮이가 있었다. 그런데 엄마를 잃고 난 뒤 그 푸른 하늘이 나보다 나이 든 이들이 먼저 가야 할 곳을 암시한 배경처럼 느껴졌다. (229쪽)


에딘버러에서 나는 시간을 아끼거나 낭비하지 않았다. 도랑 위에 쌀뜨물 버리듯 그냥 흘려보냈다. 시간이 나를 가라앉히거나 쓸어 보내지 못할 유속으로, 딱 그만큼의 힘으로 지나가게 놔뒀다. (233~234쪽)


현석에게 긴 유학생활에 생기는 이지러짐, 욕망을 너무 오래 유예한 사람의 보상 심리랄까, 복수심이 자라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이십 대 때 섬세함은 까다로움으로, 정의감은 울분으로, 우수는 의기소침함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염려했는데, 주제넘은 생각이었다. 변한 것은 내 쪽이었다. (248~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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