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혼돈의 80년대 문화
구세대가 기억하는 한국의 1980년대는 그야말로 상실과 혼돈의 시대였다. 정권을 강탈하다시피한 제5공화국은 국민들의 반발을 회유하고 억압하는 정책으로 신문화개국(新文化開國)을 선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외제는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격한 반대의 대상이 되어서 외제담배를 피우는 것도 불법이고, 영문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는 것도 금지시키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외국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쌍화차를 파는 음악다방 대신 DJ가 음악을 틀어주는 서구풍의 카페에서 비엔나 커피와 아이스크림 파르페를 처음 먹어본 청년들은 촌스러운 88 대신에 독한 말보로레드 담배를 마음껏 피웠고, 아가씨들은 가느다란 손가락에 버지니아 슬림을 멋들어지게 끼우고 다녔다.
시내 곳곳에 있던 소극장에서는 항상 영화 2본 동시상영을 했다. 2천원만 내고 들어가면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이 잘생긴 얼굴의 미키 루크(Mickey Rourke) 앞에서 금발의 킴 베이싱어(Kim Basinger)가 조 카커(Joe Cocker)의 ‘You Can Leave Your Hat On’ 음악에 맞춰 에로틱한 춤을 추는 영화 ‘나인 하프 위크(Nine 1/2 Weeks)’와 제42회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 촬영상, 청년비평가상을 휩쓸며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예술영화중 한편으로 평가받는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음반보다 한발 앞서 유행 음악들을 선별 해 내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어서 ‘길보드차트’라 부르던 불법복제 카세트테이프를 판매하는 리어커상들 덕분에 퀸(Queen)의 ‘Another One Bites The Dust’와 비틀즈(Beatles)의 ‘I Wanna Hold Your Hand’와 둘리스(Dooleys)의 ‘Wanted’를 테이프 하나에 다 들을 수도 있었다.
정식 음반을 살 돈이 없는 아이들은 청계천으로 일명 빽판을 사러 다녔다. 마분지 위에 조잡하게 흑백으로 인쇄된 표지 안에 속지도 없이 덜렁 들어있는 레코드판은 빈대떡처럼 두껍고 흠집도 많이 나있었지만, 카세트테이프와는 또 다른 맛의 완성된 LP를 소장하는 그 느낌은 내가 마치 음악도 모르는 조무래기 친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문가가 되기라도 한 듯이 어깨가 으쓱한 기분이었다.
‘AFKN’과 ‘American Top 40’
그 당시에는 AFKN이라는 주한미군 전용 채널이 있었다. 6.25 전쟁 당시 유엔군과 주한미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처음 이동용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AFKN은 1954년 용산기지에 키스테이션을 설치하고 이후 텔레비전까지 확대하여 1996년까지 ‘채널2’라는 고유번호를 갖고 국내에서 미국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외국 방송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에 AFKN은 인기가 높았다. 특히 팝송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AFKN~Super Station!’하는 로고송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미국국가 ‘성조기여 영원 하라’가 나올 때까지 밤을 새우는 경우가 많았다.
팝송 마니아들 사이에서 AFKN이 유명했던 것은 라디오 프로그램 ‘American Top 40’와 DJ 케이시 케이슴(Casey Kasem)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American Top 40는 미국 ABC Radio에서 제작하는 주말 프로그램으로 한주간의 빌보드 차트 100중에서 40위부터 1위까지를 차례로 소개해주는 인기방송이었다.
1970년부터 1988년까지 American Top 40를 진행했던 케이시 케이슴은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주둔하며 AFKN의 DJ로 활동했었던 이력이 친근한 느낌을 주었고,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지는 화려한 말솜씨로 국내 음악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음악과 영화가 공존했던 시대
1980년대는 진정한 뮤지션들의 군웅할거의 시대였다. 매주 American Top 40에서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명곡들이 쏟아져 나왔다. 1983년에는 영화 ‘플래시댄스(Flashdance)’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하면서 명작곡가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가 맡은 O.S.T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Thriller’를 누르고 정상에 올랐다.
아이린 카라(Irene Cara)가 부른 주제가 ‘Flashdance…What A Feeling’은 6주간 차트의 정상을 지켰고, 마이클 셈벨로(Michael Sembello)의 ‘Maniac’ 역시 상위권에 올랐다.
1984년에는 프린스(Prince)와 록웰(Rockwell)이라는 걸출한 흑인 뮤지션이 두 명이나 등장했다. 프린스는 [Purple Rain] 앨범에서 ‘When Doves Cry‘와 ’Let's Go Crazy‘가 연달아 1위를 차지했고, 록웰의 ’Somebody's Watching Me‘도 상위권에 올랐다.
1984년에는 이변도 많았다. 헤비메탈 밴드 최초로 반 헬렌(Van Halen)이 ‘Jump’로 차트에 올랐으며, 포인터 시스터즈(Pointer Sisters)의 동명이곡 ‘Jump (For My Love)’도 동시에 차트에 올랐다.
또 하나의 이변은 프로그레시브록 밴드 예스(Yes)가 ‘Owner Of A Lonely Heart’라는 파퓰러 송으로 차트 정상에 오른 일이었다. 이 무렵에는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의 ‘Footloose’와 필 콜린스(Phil Collins)의 ‘Against All Odds’처럼 영화가 히트를 하면 O.S.T도 자연스럽게 히트했다.
1980년대 사람들은 예술이란 함께 하는 것이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었다.(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