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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 아물 수 있다

by 시니

정이는 오늘도 출근을 한다.

9401-1번은 9401보다 한산해서 좋다.

안전벨트를 한 후 휴우 숨을 내쉬어본다.

어젯밤 일찍 잠들어 살펴보지 못한 카톡, 블로그, 인스타, 문자, 뉴스를 살펴볼 시간이다. 그러나 한남오거리에서 한남대교를 건너는 동안은 바깥 풍경을 본다. 멀리 보이는 한강 저곳에서 고 손정민 군이 발견되었었다. 젊은이가 강 속에서 얼마나 차갑고 추웠을까? 정이는 그 사건이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저기를 쳐다보면 아직도 마음이 찡하다. 한남대교는 보호대 위에 둥근 플라스틱을 더 쌓아 올렸다. 그것이 시야를 가려 한강의 멋스러움은 이제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 아래로 떨어졌기에 저렇게 아예 못 올라가게 만든 것일까?

정이는 버스 창에 빗방울이 붙어 내리는 걸 무심히 본다. 달리는 버스라 사선으로 빗방울이 다가온다. 무수히 달려오는 빗방울이 고 손정민군인 것 같고, 그의 아버님을 닮았고, 한강으로 떨어진 누군가와 그의 가족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들의 눈물 같았다. 살려달라고, 살아만 있어 달라는 아우성이 들린다.

정이는 갑자기 가슴이 꽉 막혀온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심장이 아려온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비의 방울들이 유리 파편으로 온몸에 꽂히고 만다.

그날의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 또...

어떤 장면을 보면 연상 작용이 생기고 자신의 경험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하지만 긍정의 좋은 경험도 많았을 텐데 하필이면 정이의 삶 중 가장 불행한 한때가 떠올라졌나 모를 일이다.

하긴 자주 있는 일이다.

남편이 된 남우와 함께 결혼 전 연애시절 함께 우산을 쓰고 사선으로 내리는 빗방울에 온몸이 젖으면서도 뜨거웠던 때도 있었지 않나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 은지와 함께 우산 없이 책가방을 머리에 얹고 뛰어가면서 까르르 웃던 때도 있지 않나 말이다.

그러나 정이는 그날 그 순간이 떠올랐다.

정이 스스로 혼자 월세 살던 방 유리문을 소주병으로 던져 온통 유리조각으로 만들었던 날 말이다.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좁은 골목 동네라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왔다.

정이의 비명, 소주병이 방유리문을 깨뜨리는 쫘악 와장창 소리가 까만 밤하늘 마저 깨트렸다. 파편...

정이는 특정한 사람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을 멍한 눈으로 힘없는 목소리로 "제발 저 사람 좀 치워주세요. 제 눈앞에서 사라지게 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곤 쓰러졌다.

월세방 주인아주머니는 깜짝 놀라서 119 구급차를 불렀다. 정이는 그대로 인천의료원에 실려갔다.

"당신은 누구요?"라고 앞집 할아버지가 그 젊은 남자를 향해 묻는다. 그 남자는 질문을 한 할아버지를 아주 잠깐 섬뜩한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고개를 숙여 유리파편을 줍기 시작한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동네분들은 제각각 저마다의 소설을 쓰며 머쓱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주인아저씨는 빗자루, 쓰레받기, 쓰레기통을 가져와서 아무 말 없이 함께 유리파편을 쓸어 모은다. 거의 다 정리가 되었을 때 청년은 약간 고개를 숙여 주인아저씨께 고개를 잠깐 숙여 인사를 하더니 빠르게 골목길을 나선다.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던 주인아저씨도 방 안으로 들어간다. 다시 인천 숭의동 골목은 조용한 하늘로 내려앉는다.


그다음 날 퇴원한 정이는 유리가 사라진 방문을 한참 쳐다본다. 부스스한 얼굴로 골목 밖 유리가게에 가서 주인분께 방유리를 끼워달라고 주문한다. 배가 고픈데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다. 정이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와 눕는다. 잠을 자고 싶으나 잠이 안 온다.

처음 있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15살 잠들고 있던 정이의 몸에 물컹한 물체가 닿았다. 깜짝 놀라 소리치며 일어나려 했지만 두 팔은 그놈의 힘센 팔에, 입은 그놈의 입에, 몸은 그놈의 몸뚱아리에 다 막히고 압박되었다. 처절한 10분이 흐른 후 씩 웃으며 "몸 함부로 놀리지 마라, 넌 내 거다." 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오빠... 이복오빠... 철민오빠는 10살 때부터 같이 살았는데 조용하면서도 자기 할 일을 잘했었다. 정이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었다. 유쾌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정적이면서도 지적인 느낌이라 정이는 오빠를 잘 따르던 터였다. 그런데 오빠가 한순간에 악마로 변했다. 수시로 악마였다. 죽이고 싶은 악마...


정이는 어떻게든 공부하여 집과 떨어진 대학에 들어가는 게 목표였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 그 정도 거리는 충분히 통학도 할 수는 있었지만 악마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혼자 독립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께 그 사실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정이를 불쌍하게 생각한다거나 이상하게 본다거나, 자신을 이전과는 다르게 볼 거라는 생각에서 말하기 싫었다.

그런데 이렇게 독립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취방까지 쫓아오는 악마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5년간 시달림이 앞으로도 끝나지 않겠구나 자책의 생각으로 큰 마음을 먹고 아버지,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많이 놀라셨고, 어찌할 바를 모르셨다. 어머니는 한참을 우시다가 조용히 안아주시더니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 이후로 철민오빠는 필리핀으로 보내졌다.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간간이 들리는 소리가 그곳에서 자리 잡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다행이다.

그 악마가 잘 사는 게 다행히 아니라,

멀리서 잘 살고 있다니 정이에게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구나 하는 안도의 다행이다.


그 일은 감기 같이 지나가는 일이 아니어서 사는 동안 틈만 나면 정이의 몸을 괴롭힌다.

오늘은 버스 유리창문으로 꽂혀 내리는 빗방울이 괴롭힌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어떤 일로 또 떠올려질지 부들거린다.

그래도 아버지가 해 주신 얘기가 생각이 난다.


살다 보면, 살아가다 보면, 살아져...


그 말을 되뇌면서 버스에서 내려 빨간 우산을 두 손으로 꼭 잡고 걷는다.

'불편한 이물감일 뿐이야.

파편은 붙이면 아물 수 있어.

아문 파편은 부서지기 전보다 더 단단한 거야'

이런 생각이 휘발되지 않도록 입에 힘주면서 또박또박 걷는다.


정이의 빨간 우산에 빗방울이 잔잔히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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