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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를 추모하며

by 시니

그 아이는 내 친구다.

그러니까 사실 아이는 아니다.

아이라고 하는 건 중3 때 친구였기에 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금은 전화를 해도 없는 번호라고 나온다.

문자도 받을 수 없다.

지금은 2년 반 전부터 원주추모공원에 있다.

그곳에 날씨가 좋을 때는 내 마음도 따사롭다.

그곳의 날씨가 비가 온다거나 추우면 내 마음도 을씨년스럽다.


은주는 조용한 편이지만 잘 웃고 공부를 잘했다.

얼굴도 예뻐서 그 당시에 배우 신혜수 닮았다고 했다.

그런 친구와 함께 한 시간이 있어서 뿌듯했다.

한창 사춘기라 함께 시내를 걸어 다니기도 하고, 동아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하기도 하고, 용돈으로 사가지고 오기도 했다.

담임선생님이셨던 표혜영선생님댁에 가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선생님 방은 좁았지만 품위가 있었다.

선생님께서 친히 써 둔 진초록 바탕에 하얀 글씨로 "극기"라고 써 둔 것이 늘 기억 남겨져 있다.

선생님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일의 어려움과 중요성에 대하여 열심히 말씀해 주셨다.

내게는 무척이나 진지하고 성스러운 시간이었다.

나의 멘토이신 표혜영 선생님 고맙습니다.


은주는 볼링을 함께 배우자고 하여 볼링장에 가서 한 달 강습을 했다.

실력은 둘 다 비슷했다.

깔깔 웃으며 연습했던 재밌었던 시간들...

함께 정암사에 가자고 하여 기차를 타고 짧은 여행을 했다.

약간 추운 날씨였는데 정암사의 고즈넉함과 은주가 파란 체크스카프를 어깨에 두르고 즐거워했던 모습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고3 졸업시기에 표혜영선생님께서 "미래향"이라는 그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레스토랑에 초대해 주셨다.

수프와 돈가스를 먹으며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도서관을 제일 많이 다니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사주신 스프링 두꺼운 분홍색노트.. 은주는 하늘색노트..

그곳에 책 필사, 읽고 난 소감 등을 적으라고 하셨다.

대학교 도서실에 가서 4년간 도서관에 꽂힌 책을 모두 다 읽겠다는 큰 포부를 만들라고 하셨다.

모든 말씀이 다 주옥이어서 너무나 감사했었다.


실제로 대학생이 된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도서실에 가서 책을 읽고 반납하고 또 대출하고 반납하고 대출하고 반복했다.

도서관이 좋았다.

책냄새가 좋았다.

빌린 책 4권을 팔로 감싸 안고 집으로 오는 기분이 좋았다.

갈증이 나는 책, 사고 싶은 책, 밑줄 긋고 싶은 책은 서점에 가서 사기도 했다.


은주는 그 말씀을 잘 이행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수학교사라 마지막까지 교편을 놓지 않고 사랑하는 아이들 속에 파묻혀 살아갔다.

마지막 해는 병휴직을 하고 치료를 하면서 요양을 했다.

몸에 병이 있어도 만나면 해맑게 웃으면서 얘기하고

끝까지 자신의 역할을 책임진 은주를 경외한다.

자신을 돌봐주시다가 먼저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에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과 품격을 지키려고 한 은주가 자랑스럽다.


다음 생애 태어날 수 있다면 좀 더 길게 살라고 하고 싶다.

다음 생애 태어나면 함께 여행도 많이 다녀보자라고 하고 싶다.

먼저 우리의 고향인 강원도 태백부터 가보리라.

나중엔 북유럽에 오로라도 보러 가리라.


은주야, 그곳에서 편안하게 잘 지내.

안녕!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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