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는 신생아를 맡아 일일이 떠먹여 주며 기르던 아이가 이제 스스로 아장아장 걷는 것 같아 좋았어. 어르고 달래며 키워 놨는데 갑자기 자식 뺏긴 엄마 마냥 섭섭하고 억울하더라고. 분수 덧셈부터 방정식까지 내가 지한테 들인 공이 얼만데. 시험 한 번 못 쳤다고 인연을 확 끊어버리네. 아직 정확한 결과도 안 나왔는데 다음날 엄마 오셔서 환불받아 가시더라. 시험지 볼 때 '아, 망했다' 싶었는데 번개 후 천둥치듯 우르르 쾅쾅 난리였어. 시험 기간에 간식까지 사 먹이며 무료 보충 해주잖아. 그거 생각하면 시험 끝나자마자 환불 받으러 오는 거 좀 치사하지 않니? 회비 내고 3일 지났으니 정확하게 3일치 제하고 돌려주고 싶었는데 왠지 내가 죄인인 것 같아서 그냥 다 돌려드렸어. 그리고 다음 날 그 친구 소개로 왔던 녀석도 환불해가고. 남중 3인방 동시 퇴원. 인사라도 제대로 하고 갔으면 좀 덜 섭섭했었을까.
"정말 좆같아서 못 해먹겠네. 겨우 세 시간 일하려고 씻고 화장 하고 나오는 거 아니거든. “
"그러니까 우리는 순간접착제 같은 거네요? 카페가 망하지 않게 최소한만 일을 시켜서 임시 로 지탱하는 거잖아요.“
*김의경 소설 <순간접착제> 인용
나한테 한 말도 아닌데 이 대화를 읽는데 반발감이 훅 올라오더라.
"주3일 5시간이라고 되어 있어 찾아갔는데 은근 두 시간씩 주 5일로 유도하더라고. 차비 지원도 안 해주면서 어떻게든 휴식시간이랑 퇴직금 안주려고. 사장들은 왜 다들 이기적이지?"
얼마 전 J언니가 면접보고 와서 나한테 한 말이랑 소설 속 대화가 싱크로율 거의 100%. 근데 학원일이 대체로 그렇잖아. 조금 벅차다 싶지만 선생님 한 분 더 쓸 만큼은 안 되고. 제 일 바쁠 때 두 세 시간 정도 채점이랑 자습 관리 도와줄 보조쌤 필요할 때가 있잖아. 주15 시간 이상은 휴식수당이랑 퇴직금 줘야 되니까 월수금, 화목 이렇게 나눠 두 명을 구할까 따져보는 거 당연한 거 아니야? 이기적인 사장, 딱 나인데 싶으면서 기분이 안 좋더라고. 근데 그게 왜 이기적이야? 이번 방학 때 애들 많이 쉬었잖아. 아르바이트비가 내 월급이랑 비슷해. 2시간 일찍 나와서 청소하고 애들하고 실랑이도 내가 많이 하는데. 그리고 나도 학원 대출비 다 갚으려면 아직 3년이나 남았어. 아르바이트생이 일한만큼 정당히 받거나 조금 유 리하게 시간조정 하려는 거랑 사장이 그러는 거랑 뭐가 달라? 좀 억울했어.
진짜 그 엄마 대단하지 않니? 학원비가 후불제인 줄 아나봐.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 학원을 좀 쉬게 하든가 인스타에 놀러 다니는 거 올리지를 말든가. 빚쟁이도 아니고 돈 달라고 하는 문자 정말 보내기 힘든데. 이제 학원에서 보내는 문자나 카톡은 보지도 않으셔. 그런데 수업 끊긴다고 통보하면 마지막 날에 꼭 카드 들고 온다. 그리고 한 달 치만 계산하고 가네. 단호하게 대처해야지 마음먹어도 막상 앞에서 미안하다며 '남은 회비는 곧 드릴게요.'하면 또 얼굴 붉힐 수가 없더라. 마음 넓은 척 '네, 감사해요, 되는대로 주세요.'하게 되는 거야. 일단 늦게 줘도 끊는 것보단 낫다는 계산이 순식간에 암산으로 되나봐. 엄마는 좀 염치 없지만 얘는 학원을 또 좋아해서 야박하게 할 수 없어. 그래도 이 분은 양반인 편이야. 온갖 핑계를 대며 6개월인가 미납하고 결국 돈 안내고 그만둔 엄마도 있었잖아. 애들 가르치 는 입장에서 돈 이야기하는 거 애매한데 그걸 악용하는 사람들 정말 진상손님이야.
얼마 전 학원 중학생들 밥 사준 사진을 본 한 학부모님이 "선생님 어떻게 저렇게 하세요, 참 대단하세요. 그렇게 해 줘도 괜찮나요?" 하며 칭찬을 하시는 거야. '애들이랑 즐겁게 지내는 게 참 좋아요. 아이들 덕분에 오히려 젊어지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는데 뭐 거짓말을 아니지만 스스로 가식적인 느낌이 들더라. 사실 친절의 밑바탕엔 애들 학원 좋아하게 만들어서 내편으로 만들고 계속 다니게 하려는 거잖아. 교육자로서의 애정이라기보다는 장사꾼의 서비스 정신인거지. 가끔 애들 말 안 듣고 짜증나게 하면 속으로 '그래도 돈인데 내가 참자.' 하면서 버티는 건 아마 부모님들 모르실 걸. 그래서 블로그랑 인스타 보고 찾아오는 손님한텐 좀 미안할 때가 있어. 그것만 보면 엄청 친절하고 애들 진심으로 좋아하고 위하는 그런 이미지잖아. 근데 사실 나는 애들이 와서 "선생님 오늘 체육시간에요......."하면서 쓸 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하면 딱 귀찮아져.
이 일과 어느새 22년째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고 있어. 그러다보면 가끔 속 시원하게 뒷담 까고 싶은 날이 있더라. 말하고 나면 잠깐 먹구름 지나간 듯 개운해지는데 역시 뒤끝이 찜찜해. 우리 엄마가 아빠 흉 실컷 보고 항상 마지막에 하는 멘트가 있거든.
"그래도 너희 아빠 사람은 좋다 아이가."
투덜거려도 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섭섭할 거야. 그래서 나도 마지막은 훈훈하게 마무 리하고 싶네. 그게 아이들과 내 일에 대한 예의겠지. 실컷 욕하고 두둔해주는 부부처럼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다. 참! 아까 말했던 환불 받아간 친구, 다시 돌아왔어. 의리가 없니, 내가 저를 어떻게 가르쳤는데 하며 얼굴 달아오르게 흥분한 건 다 잊었나봐.새로운 학생 열 명 보다 더 반갑더라.